한여름 불의 사주로 태어난 저는
햇살이 내리쬐는 맑은 날을 좋아했죠.
밤샘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신입시절-
팀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간 시간을 쪼개서
해가 잘 드는 회의실 창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햇빛을 쬐고 했답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햇빛을 쬐는 순간,
스트레스와 피로로 방전이 된
몸과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충전이 되는 기분이 들곤 했죠
뽀얀 피부를 위해 철저히 햇빛을
차단하는 여인들과 달리,
저는 틈만 나면 햇빛이 내리쬐는 곳만 골라
해바라기처럼 하늘 위로
고개를 들고 성큼성큼 걷기도 했죠
그 덕분에 지금의 제 얼굴엔
이미 피부에 안착한 갈색 얼룩의 기미가
저와 남은 생을 함께 할 기세랍니다.
그런 제가 최근 들어 흐린 날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답니다.
흰 물감에 검은 물감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물을 듬뿍 머금은 붓으로
조심조심 썩어 놓은 것 같은
흐린 하늘 위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며
지붕과 집들이 너무 색달라 보였거든요.
흐릿한 배경 속에서 선명하게 도드라진
피사체들을 차분히 관찰하며
저 또한 밝은 날의 눈부심에 가려졌던
저에게 집중하게 되었답니다.
책을 읽으면 한없이 빠져들고
그림을 그리면 부지런히 움직이는
저의 손놀림이 신이 나고
글을 쓰면 생각의 실타래가
줄줄 풀려나가는 것처럼
막힘없이 써내려 가게 되죠.
나도 모르게 잘해야 한다는 욕심보다
하고 있다는 과정을 즐기게 되는 지도 몰라요.
도쿄 유학시절, 창밖의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며 참으로
많은 것들이 떠올랐답니다.
그 빗속에는 그리움, 후회, 결심, 눈물, 용기... 등과 같은
저를 웃게 했고, 저를 울게 했고
저를 살게 했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곤 했죠.
곧 장마가 시작되겠군요.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니
왠지, 두근두근 마음이 설레네요.
곧 쏟아질 비와 함께
맑은 날에 가려졌던 또 다른 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남은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