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면, 한 달에 한 번쯤은 반드시 낯선 곳으로 떠나리라 결심을 했던 적이 있다. 인생은 말하는 대로 어느 순간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있다던 어느 작가의 글처럼,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었다. 내 요량 것 쓸 시간은 늘어가는 나잇살만큼이나 많아졌으나, 한 달에 한 번쯤은 낯선 곳으로 떠나겠다는 결심은, 떨어지는 체력과 집순이로 뿌리내리며 덤으로 생긴 게으름 그리고 문밖으로 나가기 위해 해야 하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귀찮음으로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11월이 되어 곧 겨울에게 밀려날 얼마 남지 않은 아쉬운 늦가을에, 어디론가 떠나지 못할 핑계들을 억지로 제거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는 집을 나섰다. 씩씩거리며 동서울 터미널로 가서 강릉행 버스 시간표를 뚫어져라 올려다보며 또 망설인다. 그냥 광화문이나 한 바퀴 돌고 서점이나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굳이 강릉까지 가서 바다를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스멀스멀 악마의 유혹처럼 나의 무기력이 또 고개를 쳐드는 순간, 나는 재빨리 외쳤다 " 강릉 1장요 " 커피 한 잔을 사고 서둘러 버스에 오르는 순간, 나는 감지했다. 이 여행은 분명 즐거울 것이다. 그 첫 징조는 바로 운전기사님이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말끔한 복장을 한 기사님은, 표를 내미는 나에게 찡끗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오늘 강릉 바다 멋질 겁니다. 제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 살가운 그 인사말에 심쿵 한 나는 반달눈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 후로도 나의 가을 여행을 응원하는 즐거운의 징조들을 줄줄이 이어졌다. 경포 해변으로 나를 데려다준 택시 기사 아저씨의 유쾌한 관광안내,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먹었던 너무 맛있었던 초당 순두부, 해변을 거닐면서 엿들은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의 웃음 절로 나오는 풋풋한 농담들 그리고 탄성이 절도 나왔던 적당히 안개가 낀 해 질 녘의 파스텔톤의 하늘과 바다 -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둣집 옆 수제 맥주 가게에서 주인아저씨가 이것저것 시음 후에 권해준 강릉 백일홍 맥주는 너무 맛있었다. 까맣게 바다와 한 몸이 되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안주 삼아 맥주를 천천히 홀짝였다. 떠나오니 이렇게 좋은 걸, 왜 그렇게 문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 것이 그리 어려웠을까? 문을 열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를 돌아보기 위해 혹은 나에게 질문하기 위해 낯선 곳으로 수시로 떠나야 한다던 모 작가의 글에 새삼 공감을 하며 나는 또 결심을 한다. 한 달에 한 번 무작정 시외버스를 타자. 이 아름다운 자연과 정 많은 따뜻한 사람들이 기다리는 낯선 곳으로 떠나자.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