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영화 ‘언아더 라운드’에는 술꾼이라면 귀가 솔깃할 흥미로운 가설이 등장한다. 인간에게는 0.05%의 혈중 알코올이 부족한데 이것을 채워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창의적이고 활발하게 살고 싶으며 술꾼임에 분명한 누군가에게는, 날마다 술을 마셔줘야 한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되니 분명 ‘그래, 그거였어’ 하고 호재를 외치고 싶어질 것이다. 그 누군가의 한사람인 나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이 가설을 떠벌리며 대낮부터 샤르도네 한잔을 히죽거리며 비운다. 만만치 않은 술꾼인 지인 또한 한잔으로 채워지겠냐며 잔으로 말고 병으로 주문하자고 부추긴다. 그렇게 우리의 낮술은 시작되고 만다. 모 연예인이 낮술을 마시면 내가 제법 성공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날이 환한 대낮에도 술을 마셔도 괜찮은 여유로운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만족감이 들기 때문이란다. 대낮에 술을 마셔도 되는 여유에 관해서는 그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여유로운 나는 샤르도네 한 병이 거의 비워질 무렵, 오늘 할 일을 죄다 내일로 미루기로 결심하고 한 병을 더 주문하는 호기를 부린다. 그러고 보면 낮술은 밤술과 다르게 사람을 느슨하게 만든다. 안주삼아 나누는 이야기들도 시시하지만 피식피식 웃음을 자아내는 일상의 에피소드나 농담이다. 심각하게 인생의 고민을 토로한다거나 나를 괴롭히며 가스라이팅을 하는 미친 X에 관한 험담을 꺼내는 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저냥 이유 없이 느슨해지는 방향 없이 이리저리 통통 튀는 비눗방울 같은 이야기들로 몽글몽글 넘쳐난다. 30대 초반에 파리로 혼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호텔 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밤새 뒤척이다 해가 뜨자마자 근처에 제법 유명하다는 카페로 갔다.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빼곡하게 차 있었는데,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이 동그레 졌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노 신사가 아침부터 마시는 것은 커피가 아니라 레드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해장국 집에서 마시는 해장술도 아니고 저건 도대체 어떤 풍경이지? 하는 호기심에 그 옆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말쑥한 이 프렌치 신사는 신문을 뒤적이며 너무도 젠틀하게 와인을 홀짝였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살짝 잔을 들어 보이며 굿모닝을 외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생각했다. 진정한 와인의 도시, 프랑스 파리는 다르구나 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파리지엔들의 음주를 여행 내내 눈으로 확인하며 태어나 처음으로 낮술이란 것을 그것도 혼술로 세느 강변의 모 카페에서 해봤다. 그 색다르고 짜릿한 경험이란 낮술에 대한 나의 찬사를 불러내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푹푹 찌는 무더위에 차가운 낮술이 몸도 마음도 잠시나마 무장해제 시켜준다. 자꾸 히죽히죽 웃으며 이야기를 쏟아내는 나에게 지인은 말한다. “ 야, 너 그렇게 웃는 거 참 오랜만이네. 보기 좋다.” 확실히 부족한 혈중 알코올이 채워진 것임에 틀림없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