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헤메다 만나자
욕실의 문틈으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흥얼흥얼 알 수 없는 노래를 여린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음을 따라가다가 세수하는 타이밍엔 '어푸어푸' 소리에 묻힌다. 우리 집 막냉이는 욕실에만 들어가면 콧노래를 부른다.
샤워를 할 때 물세례를 맞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소리는 볼륨을 조금 높여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감는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노래하는 입을 막았는지 '컥컥' 기침도 하면서 허밍을 한다. 나는 그런 막냉이의 천진하고 투명한 기쁨이의 마음(아직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을 사랑한다.
근원이 '나의 자궁'이어도 세상에 나온 두 아이는 많이 다르다. 첫째 춘기는 투정도 많고 불만도 많은 아이라 아이의 마음에 살펴보느라 늘 바빴다. 좀 커서 청소년기에 들어가는 때쯤 대단한 춘기가 빙의되어 조마조마한 날을 보내고 있는 반면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방긋 웃으며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울지 않고 웃는 신기방기한 아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남자아이가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로 세상 처음 '엄마'라고 불렀을 때엔 우리 가족 모두 모여 천사를 보는 듯(다섯 살 터울의 지금의 춘기마저도) 아이를 경외감 가득한 눈으로 구경하였다. 막냉이는 춘기와 내가 대립하고 싸울 때, 춘기의 어마무시한 포효를 눈으로 확인할 때, 조용히 욕실로 들어가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하기도 한다.
그렇지, 그곳은 막냉이의 공간이다. 본인도 마음을 컨트롤하고 시끄러운 가족과 단절시킬만한 곳을 찾아 헤매다 만난 공간일지 모른다. 춘기의 날카로운 소리, 엄마의 한숨, 그리고 공부잔소리 마저 들리지 않는 아늑한 공간이지.
절망에 빠진 어느 날, 막냉이의 허밍을 들으며 마음 추스르고 다시 일어날 기운을 얻었다. 나에게는 위험한 강을 건너는 춘기 말고 아직은 은색 솜털이 뽀송하게 동그란 얼굴을 감싸고 있는 막냉이도 있었지. 다시 알아차림을 한다. 나를 부르고 보채고 짜증 내며 존재감을 알리기보다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콧노래를 부르며 본인을 다스릴 줄 아는 건강하고 성숙한 존재가 있음을 잊지 말자.
콧노래가 끊기는 날, 너에게도 춘기가 오는 중이구나. 생각해야겠지?
그래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지지고 볶는 가족을 보며 나를 지키려 피하는 방법을 터득한 막냉이의 현명함을.
춘기와 전학 이야기가 오갈 때 막냉이는 나에게 편지를 썼다. 삐뚤고 못생긴 글자로 엄마를 사랑하고 누나를 이해하고 싶지만 전학은 너무 싫고 스트레스받는다는 다소 긴 편지였다. 어려운 결정을 눈앞에 둔 나는 막냉이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하였다. 엄마라는 위치는 정말 어렵구나.
아이의 콧노래는 절망에 빠진 나를 따뜻하게 들어 올리는 묘약이다.
춘기 양육 돌아보며 죄책감 사로잡힌 나를 구원하는 사랑이다.
그래, 시작은 같은 자궁이었다! 죄책감을 살짝 걷어둔다.
에바 린드스트룀 <돌아와 라일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