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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시로바로앉는여자 Feb 26. 2020

꼰대질을 하고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요번 주는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늘 일필휘지의 마음가짐 인건 아니었는데 자꾸 쳐지고 자꾸 딴생각이 나고 자꾸 비생산적인 하루가 이어진다는 무력감이 느껴진다. 이것이 모두 코로나 때문이다. 빨리 봄을 준비하는 모드 전환이 되어야 하는데 ‘걸어 다니는 스케줄러’(=박성팔)가 여기저기 일정이 펑크가 나니 갈피를 못 잡겠다. 집에서 애들 밥해주고 책만 읽거나 모든 해야 할 일은 3월로 미루고 다닌다.



페미니즘이 무엇인가


나이 40대가 되어 많이 생각해본다. 내가 페미니스트인가에 답을 할 수는 없지만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 곳곳에 녹아져 깨고 부수는 역할을 했으면 싶었다. 그리고 딸에게는 평소에 ‘여자는 이래야 한다’라는 행동을 안 하려고 노력한다. 요즘에 그런 말 할 일이 전혀 없다고 해도 나의 경우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딸내미가 남자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뜀뛰기 하며 놀 때, 물건을 고를 때 여자 아이템을 권한다거나 중간놀이 시간에 여자 친구들과의 인형놀이에 끼지 못하여 방황하는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 말이다. 어미로써 인지는 하되 딸에게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이다.


<82년생 김지영>에서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생각해보면 결국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블로그에 ‘김지영’ 책 리뷰를 썼다가 "너도 군대를 가면 된다"라고 물어뜯는 놈들 때문에 평소 조용하던 블로그가 문전성시를 이루기까지 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평소 인지하지 못하는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따뜻한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어 또 한 번 반성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낮고 여리고 조용한 음성이 때론 무섭고 날카로울 때가 있다.



이 책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보다 ’ 잠깐‘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너무 적은 분량에 놀랐거니와 얼마 전 기사 하나에 또 놀랐다. 트랜스젠더 인 한 ’ 여학생‘이 숙명여대에 합격했는데 숙대 학생들의 반발로 그 여학생 스스로 입학을 포기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상하다.
늘 차별이나 소외, 배제에 대해서는 법이 한 발자국 뒤에 있었던 것 같은데 여러 조건에 합당하여 여자가 된 여학생이 오히려 여대의 페미니스트 집단이라고 하는 몇몇에 의해 차별과 배제를 당한 것이다. 여기서 페미 니트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성전환자는 인정하지 않는다며, 이 사람이 무슨 근거로 여자인지 알 수가 없다는 이유인데 여성 한 명이라도 차별받지 않고 소수자가 생기지 않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페미니스트 아닌가 말이다.
성소주자에 대해 차별을 하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여성이고 싶고 여성으로 살고 싶어 많은 고민과 숙고와 시간을 본성을 찾는 것에 할애한 이 성전환자를 남성으로 규정하고 차별한다면 도대체 페미니스트라 칭할 근거나 이유가 없다고 본다. ‘여대’는 왜 존재하는가. 성역인가. 여성을 약자로 칭하며 사회전환 운동을 하면서 소수자를 차별하는 아이러니한 짓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6개월 전 친분이 있으신 목사님이 이화여대 교수님을 초청하여 모성애에 대한 강연을 동네에서 해주셨다.  <페미니즘과 모성애>라는 어마 무시한 타이틀이라 달랑 6명이 앉아 들었다. 교수님이 썰을 푸시며 하시는 말씀, 요즘 신입생들 60프로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며 이대를 선택한 대표적인 이유이기도 한단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보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극심한 경쟁사회에 익숙해져 남자를 경쟁상대로 보아왔고 인터넷을 통해 접해진 기사와 댓글과 근거를 모르는 대화로 익숙해진 남성 혐오주의 인식이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똥오줌 못 가린 상태의 이론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법만 배운 것이다.
이 경우에선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처럼 저는 성소수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차라리 낫다. 문재인 대통령의 위치가 이런 사적 발언을 함으로써 소수를 배척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에 발언을 조심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인데 우리는 평범한 학생, 학부모이기에 차라리 이런 의사표현이 깔끔하다는 말이다. 



내가 또 흥분했다. 꼰대처럼 스무 살 갓 넘은 아이들의 페미니스트 흉내내기를 지적하고 싶은 나의 꼰대 짓이 발동했다. 아무튼, 이 책은 표지처럼, 작가의 모습처럼, 문체가 따뜻하면서도 쉬운 언어로 우리를 반성 모드로 전환시키는 소중한 책이다. 밑줄 그은 문장이 많은데 몇 개만 건지자면 다음과 같다.


누군가는 여전히 특권이란 말이 불편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혹은 남성으로서 이렇게 살기 힘든데 나에게 무슨 특권이 있는 거냐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불평등이란 말이 그러하듯, 특권 역시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유리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지, 삶이 절대적으로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p33

누군가를 비하하는 유머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대상보다
자신이 우월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p87

'어울림의 공포’
어떤 집단의 경계 밖으로 내쳐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고, 그 경계 안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많은 걸 희생한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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