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편지를 쓰겠어요

그래서 써보았습니다.

TO. 너에게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너만 생각한다면 믿어줄까? 그럴 리 없다는 듯 ‘피식’ 입술 바람을 빼며 들어가 버리겠지. 그래도 알아. 맘속으로 얼마나 흡족해하고 있는지를.

밥을 차릴 때에도 네가 제일 맛있게 먹고 네가 제일 행복해하는 시간이니까 너 위주로 식단을 짜 놓고서는 괜히 밥투정하는 그를 나무라지. 마치 짜인 각본에 늘 그렇듯 그만 예민 보스로 만들지 뭐야.

오늘은 친구들과 잘 어울렸는지, 선생님 눈을 잘 마주쳤는지, 오늘 배운 수학은 알아들을 만했는지, 영어시간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는지. 급식에는 어떤 반찬이 나왔는지. 너의 오전 시간이 매우 궁금했지만 나는 늘 묻지 않아. 어차피 돌아오는 답은 짧거든. 누굴 닮아서 그런 건지 또 매우 답답한 마음에 너의 낯빛을 살피지만 얼버무리고 딴청 부리는 게 영 맘에 안 든단 말이지. 그렇게 감정을 뭉개고 불편한 상황을 스리슬쩍 넘겨버리는 건 나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어렸을 적 엄마한테 제일 듣기 불편한 말이 “우리 성혜는 뭐든 알아서 잘해요.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이 말이었어. 칭찬 같다고? 아니야. 많은 일을 알아서 했지만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서 늘 답답했고 그래서 부모님이 끌어주시길 바랬던 적이 많았어.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못 했어. 나까지 부모님께 과제를 던져주기 싫었던 거야. 안 그래도 힘든 부모님께 짐이 되거나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주기 싫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정서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쳐도 나의 욕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부모님 때문에 책임감만 느꼈던 것 같아. 나는 ‘이거 해주세요 ’ ‘이게 필요해요’라는 말을 못 하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어. 힘들다고 말해도 해결해주지 못할 거야. 안된다고 말해도 다른 일이 더 많잖아. 나한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겠어. 늘 그렇게 단정 짓고는 표현하지 않았어. 나는 표현하는 방법을 제대로 못 배운 거 같아.

어쩌다 내 얘기만 하게 되었네.

내가 없어도 척척 잘 해내서 나 역시 ‘우리 딸 알아서 잘해요’를 말하고 다니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런 걸까. 목소리가 떨리고 동공이 흔들리는 대도 너는 자세하게 너의 감정을 이야기하지 못하는구나. 책 읽고 책 파는 사람인데 나는 인생 헛 배우고 있어.

발랄하되 예의 있고 개성 있되 공부는 좀 따라가고 그랬으면 좋겠네. 딸아.

지난주에 담임선생님과 통화하고 흔들렸지만 그래도 수학학원은 다니지 않는 걸로 합의했지. 온라인 수업하는 날 가윤이를 보내주시면 수학을 더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선생님이 얼마나 고맙던지. 창피한 게 다 뭐야 그냥 앞에 있는 듯 수화기 너머 선생님께 큰절했어. 학원을 거부하고 나 역시 내가 봐주겠다고 큰소리쳤는데도 꽉 막힌 너의 수학 점수에 선생님이 마지막 카드를 꺼낸 듯. 아빠한테는 백점 맞는 그날까지 비밀로 해둘게.

너와 나의 비밀이 하나 더 생겼네.

화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날 손잡고 ‘올리브영’에 갔지? 촌스럽기 그지없는 톤의 아이섀도에 연한 립글로스를 샀는데 나 몰래 마스카라까지 산건 모르는 척했어. 몇 번 하다 귀찮아서 버릴 걸 알아서 말이야. 학교 안 간동 안 열심히 연습하더구나. 매일 너구리가 되는데 아빠한테는 귀신놀이한다고 거짓말했지? 그것도 지켜줄게.

너와 떨어져 있었던 1년, 두 돌도 안 된 너의 기억엔 우리 집이 없을 거야. 엄마와 아빠가 일을 한다고 너를 제천 할머니네 보냈었지. 일주일에 한 번 엄마는 너를 볼 생각에 비바람이 쳐도 몸살이 걸려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너에게 달려갔어. 일주일을 놓치면 우리 아기를 보름이나 못 보게 되어 얼마나 힘들어질지 생각만 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았어. 그래도 그 일 년이 미안해서 엄마는 너에게 평생 죄를 짓고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도 가슴 한쪽이 아려.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도 유독 예민한 감각도 엄마 아빠 때문에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야.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조금은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란다.

이번 가을 더욱 힘내서 사랑할게. 내 딸도 힘내서 수학 공부해주길.


From 너의 황소 같은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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