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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시로바로앉는여자 Oct 03. 2021

엄마의 엄마가 나타났다!

셔츠를 들추어 배꼽을 확인했다_엄마인터뷰

억지로 소환한 기억들은 시간이 흘러 어느정도 가공된 상태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나는 긴 시간을 가지고 엄마를 인터뷰하면서 꼭 글을 써야지 다짐했다. 그것이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인 것 같았다. 요양병원에 아빠를 모시고 오는 날 홀로 남겨진 엄마의 기분이 어떤지 궁금했다. 3년여의 짧지 않은 시간동안 아빠의 비상식적인 행동은 점점 더해갔고 엄마는 남은 여생을 누군가의 돌봄으로 나를 소진시켜가며 지내다 가는 걸 

원하지 않으셨다. 이젠 늙은 몸을 스스로 추스리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셨다. 엄마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다. 치매걸린 시부모를 모셨었고 이제는 치매걸린 남편까지 케어하며 산다는 건 엄마에게도 가혹한 생이다. 

" 엄마, 기분이 좀 어때? 시원섭섭하지?  이제 엄마 스스로만 잘 돌보았으면 좋겠다. 너무 늦었지만 "

일주일 후 나는 엄마의 기분을 살피며 전화를 했다. 

" 뭐, 그냥 그래. 삶이 조용하네. 구름이한테 너무 냄새가 나서 못살겠어 "

엄마는 산책도 안시켜줘서 한쪽 구석에 풀죽어 쭈그려 있는 구름이 핑계를 대며 다른 이야기를 하신다. 전화 기 너머 약간의 서운함과 무기력함이 전해왔다. 바라던 바인데, 그다지 행복하거나 편안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예지몽이 잘 맞고 유난히 식스센스가 발달한 엄마, 엄마가 해주는 이야기가 때로는 <전설의 고향>내용인지 진짜 있었던 우리집 역사인지 햇갈리때가 있다. 내가 어른이 되면서 엄마의 고통을 반만이라도 이해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춘매 여사와의 인터뷰를 했다. 엄마의 이야기를 하며 엄마의 한 평생을 훑고 지난 날을 정리하며 조금은 마음의 통증이 희미해지지 않을까하는 바람으로 시작된 인터뷰를 휘발시키고 싶지 않았다. 중년이 된 딸은 한없이 사랑했지만 존경하지는 않았던 엄마의 삶을 글로 복기해 보기로 하였다.


엄마의 엄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부고를 전해 들은 것은 그날 이른 아침이었다. 아무래도 엄마가 간밤에 꿈을 꾸셨다길래 위독한 할머니가 하늘로 가실준비가 되셨다고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 인천에 외가댁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임종을 지키셨는데 대구에 있는 우리는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성혜야, 밤에 할머니가 나에게 인사를 하시러 집에 들어오셨어. 그리고는 문지방을 넘어 스르륵 사라지셨는데 가다가 멈추고 가다가 멈추고 계속 나를 돌아보시더라. 새벽 4시쯤에 꿈속에서 엄마를 부르며 잠을 깼어. 성혜야, 그런데 삼촌들한테 물어보니 새벽 4시쯤 가셨데. 나에게 들리셨다 가신 거야. 막냇딸보러 멀리까지 오셨네 우리 엄마가" 

엄마는 울먹이며 말씀하셨다.     

살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임종을 연달아 겪었지만 어린 나에게 슬픔은 그닥 크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추억이 많지 않고 그저 하늘나라에 가실 때가 되었나 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지난주 친정에 가서 엄마를 붙잡고 꿈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꿈과 현실 그리고 무서웠던 기억들을 말해달라고 졸랐다. 실은 잔소리와 짜증과 화를 아빠에게 매일같이 퍼붓다가 그 대상이 사라져 엄마도 분명 적적하고 입에서 단내가 날거라는 걸 알기에.  엄마의 꿈이 찰떡같이 맞을 때가 많아서 어떨 때는 종교인이나 무속인으로서의 업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처음으로 들은 이야기가 외할머니 임종 이야기였다. 

염을 하는 할머니를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고 했다. 삼촌과 이모들은 모두 할머니가 편안하게 눈을 감으신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데 엄마는 아니었다. 염을 하면서 마지막 과정에 할머니의 얼굴이 갑자기 '찰나'라고 할정도로 순간 일그러졌다고. 엄마는 할머니가 아주 짧은 순간 무섭게 보였다고 했다.

"춘매야, 아니야. 엄마는 아주 편안하고 행복한 얼굴이셨는데 너는 참 이상하다"

고모가 핀잔을 주셨다.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고 대구로 돌아오신 다음 날부터 엄마는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된다. 

혼자 있을 때만 보이는 할머니다.

‘휙휙~’ 

순식간에 날아다니며 어느 날엔 화장실에서 쪼그려서 빨래를 열심히 하고 계시다가 어느 날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계시는 할머니다. 그리고 중얼중얼거리신다.

"춘매가 불쌍해서 이걸 해줘야지. 춘매가 힘들어서 이걸 해놔야지" 

오직 혼자 있을 때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에 엄마는 몇 날 며칠 잠을 못 자고 말라가고 있었다.  여기서 나의 기억은 엄마는 매우 아프셨다는 것이다. 학교갔다오면 항상 창백한 얼굴로 누워계셨다. 삼촌들과 이모들은 엄마가 막내딸이 눈에 밟혀 못 가시나보다 라고 안타까워하셨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고 했다. 

이북에서 전쟁 때 피난 오시며 산모가 제대로 먹지 못하여 여리고 여린 칠삭둥이를 낳고 아기가 울지 않아 가만히 덮어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3일 만에 아이가 울어 부랴부랴 빈 젖을 맥이고 거두었는데 8남매의 막내딸은 너무 약해서 늘 애지중지 해도 골골거렸다. 그 막내가 우리엄마, 나춘매 여사다.

계속 할머니는 뒷모습만 보여주신 채 일만 하고 있었고 엄마 곁에 한 달 내내 살고 계셨다. 엄마는 할머니 귀신을 보내야 했다. 이렇게 같이 살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서 끙끙 앓고 어린 나는 '우리 엄마가 또 많이 아프시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 시간을 보냈겠지.

늘 그렇듯.     

오랫동안 할머니 귀신을 보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신 엄마는 기어코 팔공산 중턱 점집까자 다녀오셨다. 고통의 막다른 길에는 결국 무당집에 가야 하지. 요즘처럼 상담센터나 정신과에 가야 하는 인식이 없던지라 무당집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막내를 지키고 싶은 할머니가 염할 때 엄마에게 들어와 대구까지 같이 내려온 모양이라고 했다.

굿을 하자는 제안에 주저 없이 그리 하셨단다.  새벽에 인천에서 공수한 할머니의 옷가지와 우리 가족의 옷가지를 챙겨서 산으로 올라가 태우고 넋을 달래는 자그마한 굿을 한 후 할머니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받아 적으며 '전설의 고향'에서 본 내용과 헷갈리기 시작했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이다. 

    

지난달 엄마는 외가댁 식구들과 함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무덤에서 꺼내 화장하셨다. 삼촌들은 대부도 앞바다에 뿌리자고 하였는데 엄마는 완강히 고집을 피우셨다.

 "아버지 어머니 뼛가루를 고기들이 먹고, 또 그 고기를 잡아 사람들이 먹을 텐데 절대 나는 반대야. 절대 안 되지!" 

삼촌들의 의견에 엄마가 그렇게 완강하게 반대하시 건 처음이었다.

대부도 초입 작은 동산에 소나무 두 그루가 자리 잡은 곳, 그 사이에 두 분의 흔적을 함께 묻고 돌아오는 날 엄마는 다하지 못했던 효도를 한 듯 편안하게 주무셨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나의 유년을 돌아보는 것과 같다. 성장하지 못한 내면아이가 살펴보지 못하고 허투루 지나왔던 시간을 다시 곱씹어 잘 정리하여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행위. 엄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을 짜맞추며  엄마를 존중하고 또한 나를 받아들이는데 씨앗이 되지 않을까 확신이 들었다. 부모가 먹고살기 바빠서 정서적인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나에게 그들이 자식들에게까지 고통의 시간을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려고 우릴 잠시 안전한 곳에 밀어두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분명, 엄마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서사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나는 그후로 종종 '이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2023년 9월 10일 다시 쓰고 퇴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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