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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시로바로앉는여자 Oct 08. 2021

나의 불어 선생님은 엑소시스트

셔츠를 들추어 배꼽을 확인했다 _ 엄마인터뷰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청순가련 세례명이 있다. 다들 들으면 '푸훗'하고 뿜어버리는데 이름 일부러 골랐냐며 확인한다. 그럴 리가... 천주교의 세례명은 나의 생일과 일치하는 성인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엄마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대구로 이사 후 한동안 종교가 없었다.     

동네 친구인 지영이가 '내가 너의 대모가 되어 줄게' 하고 나를 인도한 곳이 성당이다.

교회와는 분위기도 달랐고 제대로 성경공부를 하여 세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종교에 진지하게 접근함이 좋았다.  당시 예민 보스 덩어리였던 사춘기 소녀는 종교에 큰 이유와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평소 미지의 대상이었던 신부님과 수녀님의 생활이 너무 궁금했다. 엄마가, 우리 나춘매 여사님의 꿈은 수녀님이었으니 나는 수녀님을 동경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성당에서 보낸 시간들 덕에 조숙하고 신경질적이었던 내 방황의 골목을 잘 지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여름에 젊은 신부님과 텃밭을 가꾸며 하는 이야기들도 좋았고 친구 집에 우르르 모여 밤새워 전기놀이, 인디언밥, 보물찾기 등 유치한 어린이 놀이, 게임하는 것도 좋았다. 여대생 예쁜 언니가 이끌어주는 성경모임도 내 안의 큰 기쁨이었다.     




고등학교도 우연인지 천주교 재단이다. 신부님이 상주해 계셨고 주 1회 합동미사도 본다. 물론 참여는 자유다. 제2 외국어 선생님은 풍채 좋으신 60대 초반 할머니 수녀님이다. 오자마자 수업은 상관없는 듯 본인의 이야기를 한껏 풀어놓으셨다. 공부에 안테나를 세운 한 두 명은 이 수업 끝났다는 표정으로 영어책을 펴놓고 본인 공부를 하는데 나는 웬일인지 불어 시간이 너무 기대되었다. 할머니 수녀님도 좋고 불어도 좋아.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불어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할머니 수녀님은 풀어서는 안 될 이야기보따리를 이미 풀어헤쳐버리셨기 때문이다. 네버엔딩스토리가 될 것 같은 궁금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는 할머니 수녀님이 '엑소시스트'라는 사실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도 믿기 힘드시겠지만 당시 수녀님의 권위를 생각한다면 정말 사실이 아닐까 한다. 로마 교황청에서 인정한 엑소시스트 몇 명 중 하나라고 하셨다. 교황청이 사제 퇴마 행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2014년인데 이미 1992년도에 할머니 수녀님이 엑소시스트로 활동하셨다니 현세에 만나기 힘든 대단한 분을 만나고 있는 듯했다. 

등골이 오싹하다. 

글을 쓰며 긴가민가 찾아보니 각 종교별로 ‘퇴마 행위’라는 게 있긴 한데 천주교 교황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파장은 우리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아이들의 반 이상은 할머니 수녀님의 권위까지 뭉개며 선생님이  ‘뻥친다!’고 하였다.   

  

<구마 예식서> 

1. 성인 호칭 기호

2. 시편 기도

3. 마귀를 쫓아내는 명령과 안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기도함)

4. 복음서 봉독

5. 성수 성유 소금 사용     


이와 같은 순서로 퇴마 행위를 하는데 심리상담처럼 여러 번을 만나며 행한다. 소위 '귀신 씌었다'라고 했을 때에 무당을 찾아가 듯 본인이 믿고 있는 종교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뭐야, 귀신도 있고 사탄도 있는 거였어!!!     

할머니 수녀님은 그 상황이 영화에서 본 장면과 거의 같다고 했다. 혀가 비정상적으로 나오면서 동물 같은 음성변조가 일어나거나 갑자기 상대방 사제와 대화를 시도한다거나 눈에 흰자가 많이 보인다던가 하는 상황 말이다. 할머니 수녀님의 말을 빌리자면 혀가 땅에 닿을 정도로 길어진 환자도 있단다. 많이 보다 보면 무섭다기보다 고통에서 어서 벗어나게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하시다고 했다. 

한 소녀는 너무 마르고 원인을 알 수 없이 아프기만 해서 수녀님이 몇 번을 만났다고 했다. 소녀가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는데 아기 때 죽은 언니 귀신이 들어가 있었다고 했다. 너무나 살고 싶어서 하늘로 가지 못하고 동생의 몸을 빌어서 머문 언니. 그렇다고 해서 언니가 사랑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을 원하는 쪽이 너무 간절하면 귀신도 되어 매달리는구나.  '지금 이곳'에서 엄마 아빠의 사랑받을 수 없는 아픈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다. 

엄마의 꿈 이야기들과 간혹 듣는 뉴스나 수녀님 이야기를 조합해 보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영적인 세계'가 진짜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 증거를 46년 살면서 종종 목격해 왔다.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닌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75% 확신을 가지고 있는 어른으로 자랐다. 시간의 틈이든 공간의 틈이든 균열이 생긴 틈 사이로 삐져나온 영적인 존재를 우리는 늘 목격해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증명할 수 없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은 외면하고 살고 있다. 아픈 일들은 더더욱이 외면하고 살고 싶어 한다. 억울함의 원인을 파헤쳐보면 모든 것의 이유는 ‘사랑’이다. 

   

할머니 수녀님은 본인이 성직자인지 퇴마사인지 헷갈릴 때가 많아서 종교에 회의감이 들 때 로마에 가신다고 하셨다. 비밀요원이라 공개할 수 없다고 하셨지만 할머니 수녀님은 켜켜이 쌓여있는 경험만큼이나 무언가를 말씀하고 싶어서 입이 늘 근질근질하셨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처럼 쏙쏙 빼먹을 수 있는 이야기가 가득이다. 옛날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홀리는 법이니까.

불어 발음이 영 안 좋으신 것은 가장 큰 불신의 장벽을 제공해 주신 셈인데 달달달 외우는 방법이 아니라 문화로 가르쳐주시는 외국어라 좋았다. 할머니라서 느껴지는 푸근함 때문인가 자는 애들도 유독 많았고... 

고3 때 프랑스로 가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지금 할머니 수녀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혹시 너무 비밀을 누설해서 교황청으로부터 제지를 당한 게 아닐까?     

사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을 것 같은데 교황청 공식 인정한 2014년에 250명 안에 들으셨는지도 궁금하다. 신부님이 아니라 수녀님이라 더 특별하다. 그 시대에 프랑스에서 사제 공부와 수련을 하시고 퇴마사로 인정을 받아 활동한 이 시대의 신여성. 

할머니 수녀님, 나의 불어 선생님.

살아계시다면 여쭙고 싶다. 수녀님이 원하던 고통 없는 세상은 아직 멀었지요?


2023년 9월 30일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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