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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시로바로앉는여자 Oct 12. 2021

그린맨션

셔츠를 들추어 배꼽을 확인했다_ 엄마인터뷰

11살 때 인천에서 대구로 이사를 했다.

아빠의 교통사고로 아빠가 군대를 전역하시면서 '해군아파트'에서 나와야 했고 20년 된 직장을 잃은 아빠는 고향인 대구로 가자고 하셨다. 연로해지신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 가야만 했던, 내가 기억하지 못한 이유도 있을 터였다. 이사 간 곳은 2층 양옥집이었고 우리 집 맞은편 블록엔 3차에 걸친 대단지 아파트가 있었다. 대구의 서쪽에서 가장 큰 단지고 주변 상권을 아우르는 거대한 주거지다.

낮고 오래된 2층 우리 집 맞은편 도로 대단지 아파트 친구들은 엄마 아빠가 전문직(의사, 변호사, 교사 등)인 경우도 많았고 '과외'라는 것을 하기도 했다(이전까지는 과외가 무슨 단어인지 몰랐던 나)  어리버리했던 초반 2년은 대구 적응기였다고 말하고 싶다.  잔뜩 주눅 들어 있던 나는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의 50%도 제대로 입력이 안된 채로 살았다. 억양이 센 사투리로 이루어지는 수업은 도무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조용하던 전학생이 6학년 말에 반에서 5등을 하고 나서야 아이들은 내 존재를 인정해주었다. 그때는 무엇이든 공개하던 때다. 수학 점수도, 반등 수도,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 차가 있느냐 없느냐, 심지어 피아노의 유무도 체크를 했다. 


6학년 말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나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친구의 주거환경까지 다 알게 된 그때. 대로를 두고 갈린 주거지에 따라 아이들이 따로 논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굳이 따지자면 평수도 넓고 마당이라는 것도 있는 2층 양옥집이 살기에 더 좋다고 이제야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엔 새 아파트 ‘그린맨션’은 부의 상징이자 꿈의 동산 같은 것이었다. 

어쩌다 친구 집 ‘그린맨션‘을 다녀온 날이면 엄마에게 이사를 가자고 졸랐다. 소리마저 울리는 커다란 방들이 부러웠고 단지 내에 자리 잡은 아담한 '그린독서실'과 알록알록한 놀이터 그리고 어디서도 본 적 없았던 영어유치원도 그린맨션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서론이 길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8년 후 그린맨션에 입성하였다. 아직 아파트의 부러움이 가시지 않던 고등학생 때다. 세 자매 각자의 방이 생겼고 아파트 단지 내 '그린독서실'을 당당하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행복은 잠시, 며칠 지나고 나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엄마는 밤마다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베란다에서 자꾸 누군가가 엄마를 쳐다본다고 하셨다. 1층이라 어떤 사람이 자꾸 훔쳐보나 싶었지만 사실은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얀 소복을 입고 칼을 문 전형적인 '전설의 고향'  스타일의 여자귀신이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걸 거야. 집을 지키는 터줏대감 신들도 있대잖아."

이렇게 엄마를 안심시켰던 것 같다. 

나는 고3이었다.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와 곯아떨어지는 내가 집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는 엄마의 고충을 잘 알지 못했다. 밤마다 악몽을 꾸고 공포에 질려 하루를 시작하는 엄마는 시름시름 앓았고 날로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냥 아픈 엄마로만 기억하는 나는 최근에 엄마 인터뷰를 하고서 끼어 맞춰진 과거에 소름이 끼쳤다. 모든 것이  때문 있다는 것을.     

둘째 동생이 그랬다.

“문득문득 뒤에서 날 보는 느낌이야”

“누가?

“집에 혼자 있을 때 말이야

가끔 이야기했을 땐 흘렸었는데... 가위눌릴 때마다 장롱에 누가 있다고 했다.

'펜트하우스'에 입성한 듯한 뿌듯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의 눈은 퀭해졌고 해 잘 드는 1층 집이 '보이지 않는 귀신과 동거'하는 장소로 바뀌어갔다. 그린맨션에서 2년은 때로 쾌적했으나 전반적으로 공포스러웠다. 


우리 가족이 그린맨션을 빨리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사건이 있었다. 막내 동생의 사춘기가 가족들에게 상당한 불행으로 자리 잡았을 때쯤이다. 한 번은 친구 집에서 자고 학교를 가지 않아서 엄마가 동생을 찾으러 동네방네 돌아다녔던 사건이 있었다. 휴대전화가 없었던 그때 용케도 찾아낸 곳에서 동생이 친구랑 놀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학교를 안 갔다고 하였다. 밤새 놀다 학교를 빠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였다. 그때부터 막내 동생은 이유 없이 학교를 가기 싫어했다. 나는 수능시험 치기 몇일전까가 동생을 찾아해멨다.  우리 가정사에서 아픈 손가락 중 하나가 막내 동생이다. 사춘기 소녀 막냇동생은 태풍전야의 을씨년스러운 바람 같았다. 다른 이유가 많이 있었겠지만 그린맨션에 이사 가고 나서 동생의 마음이 집 밖을 향해갔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맏언니인 나는 동생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기도 하고 언니가 정말 잘해줄게 라고 감언이설도 했다가 소중한 것들 모두 양보하겠다 약속도 했는데 동생은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했다.     

“이사 오고 나서 좋았던 적이 없어. 어서 여길 떠나자” 


그렇게 하여 그린맨션 입성 2년 만에 맞은편 우방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여기까지가 그린맨션의 기억이다.

그러나 얼마 전 엄마의 인터뷰 시간, 내 나이 44살이 되어서 안 사실에 엄마가 또 달리 보였다. 병원에서 해결이 안 될 때 가는 곳에 또 다녀왔다고 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3차에 걸친 대단지 그린맨션은 과거에 작은 동산이었고 우리 집 위치에 공동묘지가 즐비했었다는 사실을... 그것만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이곳을 떠나지 못했던 아픈 영혼들이 하필 우리 가족을 만났고 엄마에게 더 매달렸던 것 같다.      

나의 기억은 파편이고 엄마의 기억은 완성된 퍼즐이다. 뭉개고 지나갔던 유년의 감정들과 머릿속에 박혀있던 작은 기억 파편들이 둥둥 떠올랐다. 뽑힌 기억 파편이 나를 찌를 때마다 죄책감과 공포가 휘몰아치기도 했다. 그것들을 감내해온 나의 엄마께 존경의 말 한마디 힘겹게  꺼내어놓고 슬며시 숨어본다. 여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은 엄마와의 간극이 좁혀지고 있는 걸까. 그다음 이야기를 물어본다.    


2023년 10월 1일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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