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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시로바로앉는여자 Oct 17. 2021

나도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셔츠를 들추어 배꼽을 확인했다_엄마인터뷰

춘매 여사의 이야기를 더듬더듬 완성해나갈 때쯤 마음 한구석이 일렁였다. 요번엔 엄마와 나와의 관계를 좀 더 염두에 두고 써야겠다 생각해서 일까. 나의 옛이야기들이 다양한 조각으로 소환되었다. 

설거지 그릇들을 마지막 헹굼물에서 빼낼 때

국이 바글바글 끓어 절정에 이를 때

라테의 고소한 첫 모금을 입안에 몇 초간 담고 있을 때

그리고  자기 전 말똥 한 눈으로 억지로 까만 천장을 바라볼 때

생각에 잠긴다. 

'나는 엄마를 얼마나 이해해왔나. '

일렁이는 바람은 어느새 크기가 커져있다.

분명 최선을 다했을 텐데 내가 생각하는 그때와 동생이 생각하는 그때의 감정이 다르게 새겨져 있었다. 대체적으로 우리 세 자매끼리는 매우 즐거웠었지. 그러나. 우리 막내에게는 언니들한테 구박받았다로 각인되어 있으니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기억이다.     



“언니들이 내가 칭얼대니까 장롱에 가두고 자기네끼리 좋아했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구.”



글쎄, 마흔이 넘은 동생은 친정에만 오면 막내라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했다. 동생에게 나쁜 마음을 먹고 장롱에 가둘 리는 없을 테고. 그러고서도 좋아했다면 분명 장난이었을 텐데 어린 막내에게는 공포였나 보다. 대체로 우리 세 자매끼리는 매우 즐거웠던 시절로 남은 유년이다. 그러나 막내에게는 ‘언니들한테 구박받았다.’로 각인되어 있으니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나는 분명 최선을 다했을 텐데 내가 생각하는 그때와 동생이 생각하는 그때의 감정이 다르게 새겨져 있었다. 특히, 동생의 그 한 문장 ‘나를 가뒀어’를 듣고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내가, ‘어린이 성혜’가 그럴 리가. 기억을 더듬어보고 이리저리 굵직한 사건을 뜯어보아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여덟 살 때쯤일 것이다. 나는 먼 길을 혼자서 통학했다. 만원 버스를 타고 바닷가를 한참 돌아가 30분이나 가야 나오는 초등학교였다.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는 내가 들어오기 바쁘게 나갔다. 외할머니든 친할머니든, 두 할머니께도 우리는 버거웠을까. 늘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한 둘째 동생은 학교 다녀오면 어린이집을 쏙 빼먹고 앉아 있었다. 2시부터 우리 셋은 엄마가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오락가락한다.


동생들과 가장 많이 한 놀이는 실에 과자를 매달아 높이에 따라 과자를 입으로만 따먹고 돌아오는 놀이였다. 어린 동생들이 좋아하는 과자도 먹고 몸도 움직이는 1석 2조의 놀이다. 그리고 2개 있는 바비인형을 돌려가며 가지고 놀았다. 분명 루비와 미미라 불렸던 인형도 있었는데 바비에 비하면 세련미가 떨어져서 늘 찬밥이었다. 인형놀이도 지루해질 즈음이면 밖에 나가서 소꿉놀이를 했다. 벌건 돌을 빻아 밥을 짓고 있으면 어느샌가 동네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가지각색 초록 잎들과 가루가 된 벌건 흙은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되었다. 그러다 해가 질 때면 동생들을 챙겨 집에 쏙 들어왔다. 동네 오빠와 친구들이 우리를 붙잡았지만, 빛이 사그라지면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엄마가 집에 계신 날에는 반대였다. 엄마가 우리를 찾으러 나오기 전엔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당시 엄마는 아빠가 교통사고로 보훈병원에 입원한 탓에 왕복 4시간이나 걸리는 먼 병원까지 다녔다. 약 2년간을 그렇게 생활하셨다. 실컷 놀다 지친 우리는 우리끼리 저녁을 챙겨 먹었다. 엄마가 챙겨둔 반찬과 할머니가 해준 밥을 덜어 맛있게 저녁을 먹곤 했는데. 데울 줄을 몰라 늘 차가운 반찬이었다. 그렇게 8시쯤 되면 파김치인지 인간인지 분간할 수 없는 형국의 엄마가 돌아왔다. 핏기 없는 얼굴의 엄마가 물에 밥을 말아 재빠르게 드시고는 우리를 차례로 씻겨주셨다. 고단한 시간은 엄마의 30대 내내 계속되었다. 이제야 미루어 짐작해 본다. 막막한 터널에서 엄마는 이 악물고 최선을 다하셨구나. 방치니, 학대니 그런 걸 모르고 컸다. 이런 생활이 당시 우리 가족에게는 최선이었으니까. 그렇게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으나 방치되었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글을 쓸 때면 종종 그때의 기억이 나를 찾아온다.

어린 나는 최선을 다했어. 동생들을 챙겼고 늘 재미있는 놀이를 만들었고 밥도 차려먹었어. 엄마의 손을 빌리지 않는 것이 ‘좋은 딸’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은 대책 없이 칭얼대는 막냇동생이 몹시 성가시고 짜증 났었는지도 몰라.

그래, 어쩌면 동생의 기억보다 더 많이 장롱에 가둔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으니 버거웠던 8살짜리 꼬마 성혜가 있었다. 동생이 그렇게 말하니 내 안에 있던 어린이 성혜가 억울했던 모양이다. 마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힘들고 아팠던 일들은 유독 잘 잊는다. 나에게 나쁜 기억이란 구석에 밀어두었다가 한 번씩 꺼내어 곱씹어 보는, 숨겨 둔 카카오 100% 초콜릿 같은 것이다. 쓴맛이 압도적인 초콜릿. 나에게도 동생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있었지만 우리 모두 그 시간을 구석에 밀어두고, 잘 건너려 했던 모양이다. 우리 사이에 ‘대폭발사건’ 이라 불릴 만한 갈등은 없는걸 보니 우린 그냥 조금 아팠을 뿐이다. 그저 조금 불편했을 뿐이다. 덕분에 우리 세 자매의 자매애만큼은 단단해졌으니 반쯤은 성공한 어른 아닐까.


언젠가 남편이 미워진 어느 날, 우리 세 자매끼리 술 한잔하며 유난히 강한 자매애로 노년을 채워갈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구글이미지_ 유보라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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