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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시로바로앉는여자 Oct 19. 2021

동성로에 가면 기도를 한다

셔츠를 들추어 배꼽을 확인했다_ 엄마인터뷰

“주하야, 이거 한입 더 먹고 가라”

“왜 엄마... 나 출근 늦는다고”

“빈속에 일하면 속 아픈데. 오늘따라 이거 먹이고 싶네”


엄마는 그날따라 호박죽을 한 그릇 더 맥이고 싶었는지 신발까지 다 신은 둘째 동생을 꾸역꾸역 따라다니셨다. 그래서 한입 두입 받아먹고는 예민해진 동생은 지각이라며 쏜살같이 나가버렸고 그 시간이 9시 35분이었다.

여느 때면 9시 30분쯤 나가서 바로 오는 지하철을 타야 회사에 10시에 도착하는데 사실 지각인 셈이다. 아침시간의 5분은 이미 도착해서 커피 한잔 할 만큼의 황금 같은 시간이다. 그렇게 동생이 출근하고 30분쯤 후 뉴스 속보가 떴다. 지하철에 큰 불이 났다고. 전화를 받지 않는 동생이 걱정돼서 서울에서 근무하는 나에게 전화를 거셨다. 횡설수설하며 주하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엄마, 왜. 회사에 잘 갔겠지”

“아니야, 아니야. 오늘따라 내가 그 애를 붙잡고 싶었다고”


다 큰 딸 아침 챙겨줄 일 없이 각자 알아서 끼니 해결하고 출근하는데 그날 엄마는 일찍이 호박죽을 만드셨다. 아침잠이 많으신 엄마는 아침에 모처럼 웬일로 일찍 일어나셨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더 일찍 출발한 열차가 그랬다는데... 나도 확신 없이 엄마를 안정시켜드렸지만 불안했다. 대구 지하철은 당시 라인이 하나였다.

“괜찮데. 괜찮데.”

한 시간 후 전화가 왔다. 놀란 가슴 쓸어내렸지만 뉴스를 보고 있자니 목이 메고 눈물이 주저 없이 흘러내렸다. 고통스럽게 출구를 찾아 헤매다 생을 마감한 이들의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었다. 털끝이 뉴스의 한 문장마다  쭈뼛거렸고 밤이 되어서야 동생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에서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언니, 나 지하철 타고 가는데 중간에서 지하철이 멈췄어. 화재가 나서 앞 열차가 멈춰있데서 내렸어... 그런데 냄새가 순식간에 밀려오는데 너무 공포스러워서 전속력으로 출구를 향해 달렸어. 그건 본능이었어. 죽음이 뒤에 나를 덮치는 느낌.  언니 알지? 나 매일 출근할 때 같은 시간에 그 번호 열차 타잖아. 오늘은 그 열차를 타지 않았어. 엄마 때문에 아니 덕분에 살았어”


엄마의 집요한 ‘한입만’이 동생을 살린 것이다.

울 엄마 8년 전에도 그러시더니 요번에도 억울한 이들의 영혼을 미리 느끼신 거야 뭐야. 그래, 요번에는 엄마가 동생을 곁에 두신 거다. 아, 세상에는 찰나의 예감이 인생을 바꾸는 경우도 있는 거였다. 식스센스가 여지없이 빛을 발하는 큰 사건이었다. 

우리의 안전은 그때나 지금에나 잘 관리된 시스템이나 안전망, 사건이나 사고 이후 우리를 보듬고 위로하고 안아주는 사회적 장치나 분위기로 보호받고 있지 않아 보인다. 그저 이웃과 함께하는 마음, 그리고 그 옆에서 나를 안아주는 가족에 의해서 만이 안전이 지켜지고 또 우리를 회복하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존재같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사회적 참사 뒤에 언제나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의 유무에 따라 삶이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웃들의 큰 화재사건을 연이어 겪은 나는 사건사고 뉴스에 크게 반응하는 어른이 되었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었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죄책감과 상실감이 컸다.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순간에도 불행이 운석처럼 하늘에서 떨어질 수 있는 거라고, 선하든 악하든 상관없이. 나의 불안은 이때부터 생긴 것일 수도 있겠다. 

  

그 이후에 또 한 번의 작은 사건이 있었으니 그날 이후부터 진짜 엄마의 촉을 단단히 믿기로 하였다.

“성혜야 나 이상한 걸 봤어.”

휴가를 맞아 집에 내려와 있는데 엄마가 계모임을 하고 돌아오시자마자 이야기를 하셨다

“운전을 하고 시내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거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하는 거야. 이상하다 싶었지. 눈앞에 몇몇 사람이 땅 위에서 5센티 정도 붕 떠서 다니는 거 있지

“엥? 그럴 리가 엄마. 어지러워서 그렇게 보인 거 아니야?”

“아니야 소름이 갑자기 올라오는 게 싸늘한 기운이 돌고 좀 있다가 허공에 떠다니는 사람들을 봤다니까. 어디 가지는 않고 왔다 갔다 하더라고”

나는 어떻게 생겼냐, 어디에서 보았냐 꼬치꼬치 물은 뒤에야 알았다.

“울 엄마 귀신 봤네!”


엄마가 지나간 장소는 대구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중앙로역 동성로 입구였다. 억울함이 깊고 슬픔이 사무쳐 영혼들이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엄마는 무서운 느낌보다는 서늘하고 축축한 기운에 가깝다고 했다.  엄마 말을 듣고 생생히 그려지는 모습에 중앙로역을 지날 때마다 생각이 났다. 그날의 일들. 대구 시내를 갈 때마다 죽은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했다.     

“좋은 곳으로 가자.몰라줘서 미안해요. 이제 그만 편안한 곳으로 가세요. 잊지 않을게요”     


엄마만 꾸는 꿈, 엄마만 느끼는 기운이 본인을 괴롭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엄마의 외로운 마음은 식스 센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평생을 자주 우울하다고 했고 또한 잠을 잘 자는 일이 행복의 전부인 것 마냥 못자는 날이 많아 몸이 힘드셨다. 나아닌 다른 사람들까지 생각하게 하는 엄마의 감정과 느낌은 때로는 성직자가 되었어야 했나 싶다. 엄마의 젊을 적 꿈은 수녀님이 되고 싶었다고 하셨으니.

생각지도 못한 이들을 돌아보라고 엄마의 몸이 말해줄 때마다 내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무딘 사람으로 태어난 게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성격에 예민했더라면 늘 수선스럽고 격앙된, 혹은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살게 분명하다.

나는 자주 잊으므로 자주 다짐해야 하는 사람이다. 메모든 긴 글이든 기억을 끄집어내니 원가족이 조금 특별해 보인다. 시시하고 답답하고 숙제 같았던 어린 시절의 가족이 지금까지 잘 살아주고 버텨준 삶의 승자처럼 보이기도 하더라. 글로 남기는 ‘엄마인터뷰:무서운 이야기’는 그동안 흘려보냈던 나의 유년이기도 하고 엄마와의 연결된 기억이기도 하다. 자주 기록하는 것으로 원가족에 대한 사랑을 다짐해본다.   

최근 ‘사회적 참사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이 사건도 회자되는 것 같다  



2003년 2월 18일 9시 52분.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화재.

사망 192명 부상자 151명 실종 6명.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벌어진 지하철 화재 사망자 다음으로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지하철 화재 희생자를 낳은 불미스러운 비극이자 216명이 살해당한 이집트 항공 990편 추락사고 다음으로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살인사건이다. 방화범이 있으므로 살인사건이라고 칭한다. 선거를 앞두고 대구시에서 의도적으로 사건을 축소하고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했다. 


2023.10.14일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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