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가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이 금세 지나가버렸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로 약속시간이 다 돼가고 있었다.
진경에게는 급하게 회사 사람들과 갑작스런 회식이 있다고 말하고 퇴근 후 바로 강남역으로 갔다. 시간에 맞추기 위해 6시가 되자마자 사무실을 나왔다.
약속 장소에는 서진이 먼저 와 있었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과는 조금 달랐지만 석훈이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다시 만날 일 없을 것 같았던 준서의 두 父는 그렇게 8년 만에 재회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서진은 석훈이 8년 전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정장을 입고 나왔던 그때와는 다르게 세련되지는 못한 캐주얼 복장이었고, 흰머리도 많은데 염색도 하지 않아 행색도 조금 초라해 보였다.
석훈은 서진이 법적인 아버지로서 준서의 일 때문에 여기저기 피곤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용건이 뭡니까?"
서진이 차갑게 노려보며 물었다.
"그쪽, 준서 아버님께서도 당황스러우실 거고 경황이 없을 거라는 거 압니다. 저도 TV를 보다가 우연히 김소연 씨가 인터뷰하는 걸 봤었고, 많이 놀랐습니다.
TV에 나온 서진이의 아버지가 지금 제 앞에 계신 분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준서의 실종이라는 사실에 불길함을 감출 수도 없었고요.”
차가운 서진의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려 보고자, 그리고 석훈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꼭 전달하고자 서진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말로 시작했다.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이 사건에 몰입을 하고 감정이입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전반적인 상황은 알고 이해해야 할 당사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격이 없는 건 알지만, 고통 속에 죽어간 준서가 이렇게 된 게 다 제 탓인 것만 같은 죄책감에 이렇게 준서한테 사죄라도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얼마큼 고통을 느끼며 살아왔는지, 내가 얼마큼 큰 잘못을 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궁금한 게 뭡니까?"
"왜 이혼... 하게 되신 건가요? 두 분이 행복하게 잘 사실 줄 알았습니다."
"본인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남의 상처를 잘도 건드리시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한... 4년 전쯤 이혼했습니다. 그 이후에 소식은 잘 모릅니다. 방송 보신 것처럼 소연이가 재혼을 한 것 같네요. 제가 준서한테 법적으로 아버지이긴 하지만, 아시다시피 생부가 아니라서 소연이도 저한테 양육비 청구 같은 건 하지도 않았고, 저도 준서를 주기적으로 만나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류가 끊긴지는 꽤 됩니다."
자신도 잘 모르는 일이니 더 캐묻지 말라는 것 같았다.
4년 전이면, 서진이가 네 살, 석훈의 아들 윤서와 비슷한 또래의 나이다.
네 살이 될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준서와 보냈을 텐데, 기른 정도 없었는지 이혼 후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석훈은 더 슬퍼졌다. 준서가 서진한테도 그다지 사랑받는 아이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적어도 네 살까지는 준서를 직접 키우신 건데, 이혼 후에 안 보고 싶으시던 가요?"
석훈이 약간은 따지듯 물었다.
"그쪽도 잘 아시다시피 준서가 제 아이가 아니기도 하고, 소연이와 이혼했다고 생각하니 단 1%의 유전자도 공유하지 않은 준서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안 남더군요."
"준서는 평생 그쪽을 아빠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텐데, 제 아버지한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준서를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지네요."
서진은 침묵했다.
석훈은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했을 준서가 불쌍해서 미칠 것만 같았고, 그 감정 전부를 있는 그대로 서진에게 표출했다.
“돈 받고 정자를 판 당신한테 들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준서 일에는 더 신경 쓰지 마시죠. 그쪽과 무관한 일입니다.
그때 돈 다 받았으면 그걸로 끝 아닙니까? 그래도 생부라고 마음 아파하는 모습이 갸륵했고, 내가 죽어도 못 느낄 그 생부의 감정이 어떤 건지 궁금해서 당신을 오늘 만난 것뿐입니다. 그런 원망 들으려 만난 것 아닙니다.”
석훈은 자신에게 쏘아붙이는 그의 모든 말이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누구한테 잘못을 지적할 자격이 되는가에 대해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격이 안 된다는 걸 그의 입을 통해 들은 후에는 그에게 어떠한 말도 더 할 수가 없었고, 석훈이 준서를 위해 해야 할 일에 관해서도 서진에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한참 정적이 흘렀고, 그가 다시 입을 뗐다.
“왜 이혼했냐고 물으셨죠?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생물학적일 뿐이지만 그래도 자식을 잃은 마음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석훈의 모습에 서진이 많은 생각이 들었는지, 흥분을 가라앉히고 석훈의 처음 질문에 답을 했다.
“처음에 준서가 태어나고 처음 부모가 되는 거라 뭐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모든 게 서툴렀고 힘들었지만, 부모가 되는 과정에서 소연이랑 더욱 돈독해지고 순간순간 행복함을 느꼈어요. 이래서 애를 낳는구나 싶었지요.”
서진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겉도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해줘도 아이가 엄마만 찾는 모습에 내가 아빠의 냄새가 안 나기 때문은 아닌지... 애도 본능적으로 내가 아빠가 아니라는 걸 아는 건지 싶었어요.
그리고 초반과는 다르게 소연이와의 관계도 점점 소원해졌습니다.
나와 하는 잠자리도 꺼려하는 것 같았어요. 한참 어린 당신과의 관계를 경험해서 그런다고 내 자신과 소연이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격지심도 들었고, 그런 생각이 들수록 아내가 나 아닌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은 사실이 또렷하게 내 머릿속에 각인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석훈은 아주 의외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처음 연락 준 것도 서진이었고, 처음 만났을 때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보인 서진이었다. 냉정하고 차가울 것만 같은 그가 자격지심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는 것도 놀라웠다.
“소연이는 내가 불임인 걸 알고는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불임인 것에 계속해서 자책하고 자격지심을 갖자 어쩔 수 없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던 거구요.
준서를 키우면서 불안불안하게 관계가 지속돼 오다가 언제부턴가 제가 하는 사업까지 기울게 됐습니다.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큰 위기가 왔을 때 그동안 불안하게 유지됐던 우리 관계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어요. 극복이 안 된 거죠.
그때 제가 소연이를 많이 힘들게 했습니다.”
석훈에게 적대적이었던 태도는 어느새 자책과 반성으로 마무리됐다. 8년 전과 다르게 현재 서진의 모습에서 약간의 초라함이 느껴진 상황이 이해됐다.
"소연이 말대로 둘이 행복하게 살았거나, 아이를 꼭 가지려 했다면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정자로 인공수정 할 걸 그랬다는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혼까지 가진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석훈은 진경이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미 뻐꾸기가 자기 둥지에 알 낳고 간 모습을 못 봤잖아. 자기 둥지에 있는 알이니까 생긴 게 어떻든 자기 알이라 믿고 최선을 다해서 기르는 거겠지.”
석훈은 8년 전 ‘자연임신 원함’이라고 적은 걸 후회했다.
돈은 받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유전자를 전달했다면 준서는 서진의 아들로서 행복하게 자랐을 것만 같았다.
한참 서진의 말을 듣고 있던 석훈은 서진의 자책 속에 준서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책감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서진이 말했듯이 어쩌면 그런 태도가 당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석훈이 준서를 위해 꼭 해야만 한다고 확신한 그 일에 대해 서진에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석훈이 어렵게 입을 뗐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경찰 수사가 끝나면, 준서의 장례에 대해 법적인 생부인 사장님께 연락을 하겠지요. 김소연 씨가 부모도 형제도 없으니 그 아이의 장례는 사장님에게 어떤 형태로든 부담이 지워질 것입니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준서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안 남아 있다고 하시니, 제가 준서의 장례 치를 수 있게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석훈이 준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 가는 길 만이라도 준서가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안 들게끔 초라하지 않게 보내주는 것이었다.
교도소에 있을 생모 소연은 장례를 치러줄 수 없을 것이고, 남들이 생부라고 알고 있지만 스스로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는 서진이 장례를 치뤄준다면 이 세상 떠나는 준서가 마지막까지 비참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해야 죄책감을 갖고 있던 석훈 스스로에게 위안이 될 것만 같았다.
“저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덜고 준서에게 사죄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준서도 바랄 수 있고요."
서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골똘히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픈 상처였을 텐데, 그래도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석훈은 서진과의 만남에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자신이 바라던 것을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