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내 수중엔 ‘드래곤 볼 초화집’ 이라는 책이 있었다. 원작자의 일러스트를 모은 화보집이었는데 질이 아주 좋았다. 두껍고 매끈한 종이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림도 많이 실려있어, 3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음에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아이의 장난감과 육아용품을 비롯해 집에 수북이 쌓인 갖가지 물건을 처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초화집은 살아남지 못했다. 멋진 일러스트는 그간 충분히 감상했다는 판단 하에 중고로 판매할 물품 목록에 그것을 올렸던 것이다.
책등 모서리의 살짝 찍힌 자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새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꽤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새 제품의 절반 가격으로 당근마켓에 올렸더니, 30분 만에 연락이 왔다.
아기가 많이 어렸고 약속 시간이 밤이어서 나 대신 남편이 일을 맡아주었다. 그런데 거래를 마치고 온 남편이 오묘한 표정으로 연신 머리를 기우뚱하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다음은 남편의 구술을 정리한 것이다.
여보, 내가 경비실 앞에서 딱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벤츠 한 대가 오더라고.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벤츠가 갑자기 내 앞에 멈추는 거야. 무의식적으로 모델을 확인했는데 S500이더라고? 차 좋네, 하고 감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어떤 남자 한 명이 얼굴을 내밀고 묻는 거야.
“당근이세요?!”
내가 맞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냉큼 차에서 내렸어. 얼굴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지만 머리숱은 별로 없었어. 순간 연민을 느꼈지. 분명 나보다 어릴 것 같은데 대머리에 가까운 모습이 안쓰러웠거든... 옷은 그냥 집에서 하고 있던 차림인 듯 후줄근한 추리닝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었어.
근데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어찌나 신나 보였는지 몰라. 엄청 흥분한 얼굴로 물건을 받아들더니, 차라락 페이지를 넘겨보면서 점점 더 크게 웃는 거야. 완전히 심봤다, 득템했다! 하는 표정이었어. 그러고는 입을 거의 귀에 걸고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면서 무지 큰 소리로 인사하더라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계속 외치더라.
당근 거래하면서 그렇게 순수하게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내가 당황해서 아, 네..네..., 하고 더듬거렸더니 두세 번이나 꾸벅꾸벅 절을 하고는 돌아서더라고. 근데 물건을 가슴에 어찌나 소중하게 품고 있는지 절로 웃음이 나왔어. 아주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 팔로 감싸안고 총총총 다시 차에 타더라.
아니, 1억도 넘는 차를 타고 다니면서 고작 화보집 하나 싸게 샀다고 그렇게 좋아한다니, 너무 신기했지 뭐야. 있는 사람이 더 아낀다더니 정말 그런가봐.
신기한 건 그게 끝이 아니었어. 그 사람이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고 했잖아. 옆으로 슬쩍 보이는 운전석에는 어떤 여자가 타고 있더라고. 근데 남자랑은 반대로 아주 심드렁한 표정인거야. 남자보다 어려 보였고 날씬하고 예쁜 것 같았는데, 대체 무슨 관계이길래 여기까지 운전을 해줬을까?
여기까지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도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우리는 한동안 이 문제에 관해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나 : 아무래도 커플이겠지?
남편 : 근데 커플이라면 보통은 남자가 운전하잖아. 그리고 둘이 되게 안 어울리더라고.
나 : 흠.. 그것도 그렇네. 그럼 누나나 여동생 아닐까? 여자는 거래에 무관심해 보였다고 했지?
남편 : 응, 약간 한심하게 보는 듯한 눈빛이었어.
나 : 그럼 누나나 여동생에 한 표다. 남동생이나 오빠가 하도 졸라대서 같이 오긴 했지만 영 한심한 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남편 : 그치만 남매일지라도 역시 운전은 남자가 맡지 않아?
나 : 음... 어쩌면 그 벤츠가 여자 쪽 차였을 수도 있지.
남편 : 자가용의 도시 울산에서 서른이 넘은 남자가 자기 차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돼. 같이 가도 자기 차로 가자고 했겠지. 아님 그냥 벤츠를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나 : 아, 그러고 보니 남자가 굳이 여자한테 같이 가자고 할 이유도 없잖아. 반대의 경우라면 혹시나 치한을 만날까 무서워서 부탁할 수도 있지만 말이야.
남편 : 그러네? 혼자 가면 될 걸 여자한테 동행을 부탁할 이유가 없네. 근데 여자분 표정이 아무리 그래도 남자친구를 바라볼 때의 애정 어린 얼굴은 아니었어.
나 : 그럼 혹시 여자 사람 친구일까?
남편 : 흠... 근데 여자 사람 친구가 오밤중에 남자 사람 친구의 당근 거래에 동행해 줄 이유가 있을까..?
나 : 뭐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꼬셨을 수도 있지.
남편 : 그럼 벤츠는 여자 사람 꺼고?
나 : 아마도? 어쩌면 그 남자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서 운전을 못하거나 자기 차를 몰지 못했을지도 몰라.
남편 : 아~ 예를 들면 둘이 밥을 먹었는데 남자만 술을 마셨다거나?
나 : 그래! 그런 거지. 그러면 여자 쪽이 운전한 게 이해가 되지.
남편 : 그러면 여사친 뿐 아니라 누나 여동생일 수도 있겠네?
나 : 응, 그렇지. 그러면 그 한심해하는 눈빛도 설명되지.
우리 부부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리고 좋은 가격에 중고 거래에 성공한 것을 자축했다.
의외로 검소한 대머리 청년에게 간 나의 드래곤 볼 초화집은 잘 지내고 있을까? 어쩌면 가끔 책장 앞을 왔다갔다 하는 누나에게 딱한 눈길을 받기도 할 테지만, 대체로 호강을 누리고 있지 않을까. 그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 복슬복슬해진다.
좋은 거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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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트>라는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당근마켓 남편들'이라는 컨텐츠인데요. 너무 웃겨서 강력 추천해봅니다. 유명한 영상이지만 혹시나 못 보신 분이 계시다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