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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Nov 26. 2023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운 선율의 창조자, 푸치니 (2)

클래식 클라우드 다섯 번째 책, 푸치니 (2)

투란도트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유작이자 미완성으로 남은 최후의 걸작이다. 푸치니 편의 저자 유윤종은 이 오페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푸치니 3대 작의 세 번째 작품인 <나비 부인>도 이미 14년 전의 일이었다. 그의 창작력은 이제 시들어 버린 것인가? 성공의 나날은 추억이 되었을까. 나중에야 알게 될 일이지만,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그의 소프라노 아리아와 테너 아리아는 그 이후에야 나오게 될 것이었다.


 내가 <투란도트>의 선율을 처음 들은 것은 역시 피겨스케이팅을 통해서였다. 중국의 세계적인 페어(Pair) 팀인 쉔&자오는 투란도트로 2002, 2003년 세계선수권을 연속으로 석권했다.

    

그들의 신들린 연기와 어우러진 아리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는 나를 전율케 했다. 푸치니의 마법 같은 선율은 단 한 번의 듣기로도 거대한 감동을 자아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일반 대중들도 잘 알고 있는 <잠들지 말라>는 어떤 장면에서 등장한 노래일까? <투란도트>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옛날 중국의 한 성에 투란도트라는 (이상한) 이름의 공주가 살고 있다. 공주는 매혹적인 미모로 유명하지만 성격은 냉정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다. 그녀의 미모에 반해 청혼하는 남자들이 줄을 섰으나, 공주는 조건을 내건다. 바로 3가지 수수께끼 맞히기.

     

상대가 수수께끼 3개를 다 맞히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지만, 맞히지 못하면 즉각 사형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공주에게 홀린 남자들이 여럿 도전했으나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때 타타르 국의 왕자 칼라프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버지인 왕 티무르와 시녀 류가 그와 동행한다. 예측 가능한 전개로 칼라프는 투란도트 공주에게 한눈에 반해, 수수께끼의 답을 맞히기로 한다.

      

그가 처형당할까 걱정이 된 왕과 시녀가 만류하지만 왕자는 막무가내이고, 철없는 왕자를 몰래 사모하는 류는 <주인님, 들으소서!>라는 애절한 아리아를 부른다. 칼라프는 그녀를 위로하며 <울지마라, 류>라고 노래하지만, 결국 투란도트의 이름을 높이 외치며 도전의 신호로 징을 두드린다. 서정성과 극적 클라이맥스를 오가는 이 장면은 3막 아리아 <잠들지 말라>와 더불어 이 작품에서 가장 귀 기울일 부분이다.(283p)

    

투란도트의 아버지인 중국의 황제조차도 더 이상의 희생을 보기 싫다며 칼라프를 말리지만 그는 용감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투란도트는 자기가 수수께끼를 내는 이유를 아리아 <옛날 이곳에서>로 설명한다.

     

사이코패스로 보이는 그녀의 행동에도 뭔가 이유가 있긴 있었나 보다. 먼 옛날, 궁에 쳐들어온 군대가 로우링 공주(아마 투란도트의 조상)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기 때문에 그녀를 대신해 남자들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다.

     

사연은 안타까우나 그녀가 정신 나간 남성 혐오주의자인 건 변함없다, 아무튼 공주는 ‘수수께끼는 셋, 죽음은 하나’라고 외치고 칼라프는 ‘수수께끼는 세 가지요, 목숨은 단 하나’라고 대꾸한다.

    

곧 칼라프는 지성과 용기를 뽐내며 투란도트가 야심 차게 낸 문제 3개를 모두 풀어버린다. 문제와 답은 다음과 같다.

     

어둠을 비춘 뒤 다음 날 사라지는 것 : 희망
태어날 때 열병과 같이 뜨겁다가 죽을 때 차가워지는 것 : 피
불을 붙이는 얼음 : 투란도트


그런데 이 못된 공주는 약속도 어기고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 싫다고 패악을 부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이번엔 칼라프가 한 가지 제안을 하는데, 공주가 동이 트기 전까지 자기 이름을 알아내지 못하면 자기와 꼭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칼라프는 그 유명한 <잠들지 말라>를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라는 제목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이 아리아는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가사는 어떤 내용일까? 한 번 읽어보자.

     

아무도 잠들지 말라, 잠들지 말라.

그대 또한, 오 공주여,

차디찬 침실 속에서,

사랑과 희망으로 떠는

별들을 보고 있으리!

     

그러나 내 비밀은 내 안에 있어,

아무도 이름을 알지 못한다!

아무도, 아무도! 날이 밝으면

그대 입에 대고 이야기하리라!

그리고 나의 키스가 침묵을 풀어 그대는 내 것이 되리!

     

(합창 :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할 것이야,

우리는 아아, 죽게 되겠지)

     

밤이여, 사라져라!

별이여, 빛을 잃어라!

빛을 잃어라!

새벽이 오면 나는 이길 것이다!

이길 것이다! 이길 것이다!

    

‘빈체로’라는 발음으로 들리는 ‘이길 것이다!’라는 포효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그러나 투란도트는 마음이 너무 얼어붙어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에도 아무 느낌이 없나 보다. 마음이 급해진 공주는 왕자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시녀 류를 잡아 오라고 명령한다.

    

류는 칼라프의 아버지인 티무르 왕을 보호하기 위해 왕자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오직 자기뿐이라고 하고, 투란도트는 그런 류를 무자비하게 고문한다.

     

그러나 용감하고 선한 류는 절대 입을 열지 않고, 의아해진 투란도트는 ‘이런 고통을 감수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에 류는 그것은 사랑의 힘 덕분이라며 <얼음장 같은 공주님의 마음도>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그리고 옆에 있는 병사의 단도를 낚아채 자기의 가슴을 찌른다. 류가 거룩하게 죽어가는 이 대목은 전체 극을 통틀어 가장 애절하고 슬픈 장면이다. 칼라프와 티무르는 류의 죽음을 슬퍼하고, 군중도 동정을 보낸다.

     

투란도트와 함께 남은 칼라프는 공주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찢으며 ‘죽음과 같은 공주여, 얼음과 같은 공주여’ 라고 노래한다.

     

1926년 4월 5일, <투란도트> 초연의 지휘를 맡은 토스카니니는 여기서 지휘봉을 내렸다. 그리고 청중을 향해 말했다.

“친애하는 고 푸치니 선생께서는 여기까지 쓰시고는 펜을 멈추고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이야기는 알파노라는 작곡가가 완성한 부분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박력 있게 베일을 찢은 칼라프는 공주에게 키스하고, 류의 죽음으로 사랑에 대해 알게 된 투란도트는 그의 키스에 냉정하던 마음이 사라진다. 칼라프는  자기 이름을 밝히고, 공주는 “이제 나는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라고 답한다.

     

투란도트는 황제에게 '아버지, 저는 이 사람의 이름을 압니다' 라고 하더니, 칼라프를 바라보며 '그의 이름은 사랑이라오'라고 말한다. 그래서 둘은 해피엔딩.


     

줄거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투란도트>는 우리 같은 일반 대중이 즐기기에도 꽤 재미있는 오페라다. 내가 다른 작품과 달리 <투란도트>의 내용을 좀 더 실감 나게 소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페라 전체를 다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 극장에서 관람하진 못했고 영상물을 통해 보았는데,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DVD를 틀어주셨던 덕택이다.

     

그때 나는 이 오페라에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솔직히 동양인인 우리의 눈에는 작품 전체가 오리엔탈리즘으로 범벅이 돼 있긴 하다. 당시 서양인이 생각한 동양은 환상적이면서도 야만적이고 미개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인정하고 본다면, 볼거리가 차고 넘치는 게 <투란도트>다. 우선 장엄한 베이징의 궁성과 (서양인들이 생각한) 중국의 전통 복식이 눈을 사로잡는다.

      

이런 화려함은 1998년 실제 자금성에서 <투란도트>가 공연됨으로써 정점을 찍는다. 당시 우리나라 신문에 실린 기사를 살펴보자.


‘투란도트’(자금성) 공연 (동)-(서양)조화 대성황

조선일보 | 1998.09.08. 기사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가 5일 중국 베이징 자금성 태묘에서 첫 공연을 끝내는 순간, 공연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빠졌다. 3천 5백여 명의 내외 관객은 일제히 기립하여 무려 8분 동안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세계적인 거장 주빈 메타가 지휘하고, 중국의 대표적 영화감독 장이모(장예모)가 총감독을 맡은 자금성 투란도트 공연은 첫날부터 대성공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날 공연장을 메운 3천여 명의 관객들 중 95% 이상은 특별히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중국을 찾은 외국인으로 추산되고 있다. 첫 공연 요금은 2백50 달러에서 1천5백 달러의 고가에 판매됐으나, 이미 한달 전에 매진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 투란도트는 음산하고 공포스런 원본 분위기를 탈피, 붉은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비장한 중국적 색채로 바뀌었다. (중략) 명대에 지어진 태묘 건물은 새로 준비할 필요 없는 훌륭한 무대였다. (중략) 


한 이탈리아 관객은 ‘투란도트는 이탈리아 전통 오페라지만, 이번 공연은 중국적인 맛이 물씬 풍기며, 특히 휘황찬란한 극의 전개는 가히 상상도 못했던 것’ 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장이모 감독은 공연 시작에 앞서 ‘색채로 역사를 서술하고 음악으로 동서양과 고금을 관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역사적인 공연의 영상은 유튜브에서 관람 가능하니, 관심 있으신 독자분들은 꼭 한번 감상하시기 바란다.


<잠들지 말라> 외에도 푸치니의 놀라운 음악은 오페라를 보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시종일관 중요 주제로 등장하는 선율이 있는데, 서양인인 푸치니가 작곡했다고 하기엔 너무 동양적이어서 놀랍다고 생각했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그 선율의 비밀을 알았으니, 그것은 <모리화>라는 중국 민요였다. 단번에 중국을 연상시키는 이 선율을 들어보자.

     


글의 서두에 ‘오늘날 세계가 가장 사랑하는 소프라노 아리아와 테너 아리아’ 라는 저자의 표현을 소개했는데, 테너 아리아는 당연히 <잠들지 말라>일 테고, 소프라노 아리아는 뭘까?

     

책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내 생각엔 시녀 류의 <주인님, 들으소서!>인 것 같다. 류는 원작 소설에는 없는 (투란도트의 줄거리는 푸치니의 오리지널이 아니라, 긴 원작의 역사가 있다고 한다), 푸치니가 새롭게 만든 캐릭터였다.

    

류라는 인물은 푸치니의 장기를 좋아해준 팬들, 즉 비극적인 슬픔에 공감하고 감동하는 팬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원작에는 없었던 칼라프의 이름 맞히기 내기까지 추가된 것이다. 류의 순애보와 희생을 강조할 수 있도록.

      

투란도트 공주의 성격도 바뀌었다. 원작의 결말은 칼라프가 수수께끼를 다 맞추고 바로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푸치니는 칼라프가 역으로 문제를 내게 함으로써, ‘투란도트라는 존재를 단지 게임에 지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에 눈뜨는 존재(268p)’로 만들었다. 류의 희생이 그녀의 각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면 비극적 히로인인 류의 아리아를 들어봐야겠다. <주인님, 들으소서!>다.

     


앞에서 류의 죽음까지만 푸치니 본인이 작곡했고, 그 뒤는 알파노가 마무리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투란도트와 칼라프가 연인이 되어 부르는 이중창이 그것인데, 책에서 말하길 알파노가 쓴 이중창은 초연 직후에도, 그 이후에도 관객과 비평가들의 귀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평가가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 영상물을 시청했을 때 주인공들의 사랑이 성립하는 그 중요한 대목에서 학급 친구들이 보인 반응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슬이 퍼랬던 투란도트가 칼라프의 키스 한 번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고 학급 전체가 웃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내가 봐도 그 장면은 황당했다. 사랑의 힘을 묘사했다기보다 칼라프의 키스 실력(?)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작곡가의 잘못이 아닌 대본이나 연출상의 문제였거나, 우리가 배경지식이 부족했던 탓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어색했다. 푸치니가 후두암으로 투병하다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깝다.




이제까지 쓴 독후감 중 이번 푸치니 편은 가장 길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담고 싶었던 글이다. 책을 읽으면서 푸치니의 음악에 대한 이론적인 배경을 알 수 있어 기뻤고, 이 글을 통해 그중 일부라도 독자분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몹시 즐거웠다. 귀한 시간을 내셔서 여기 소개한 푸치니의 주옥같은 아리아를 직접 감상해 보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첫 번째 글처럼, 오페라의 줄거리는 <푸치니 × 유윤종> 책에 실린 글을 요약하고 가공한 것이다. 풍부한 자료와 상세한 설명으로 행복한 음악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해준 저자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또한 본 저서에는 내가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흥미로운 내용들 – 푸치니의 3대 조력자, 그의 가족과 연인, 스카필리아투라 운동, 베르디와의 관계 등 – 이 자세히 실려 있으니, 푸치니의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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