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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Nov 26. 2023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운 선율의 창조자, 푸치니 (1)

클래식 클라우드 다섯 번째 책, 푸치니 (1)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 3시간 가까이 이어진 장대한 행사의 피날레가 펼쳐지려 하는 순간이었다. 웅대한 성화의 불꽃 아래, 무대는 고급스러운 붉은색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전 세계인의 기대감 속에 막이 서서히 걷혔고, 모습을 드러낸 무대의 중앙엔 한 노 성악가가 서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하자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도, 선수들도, 시청자들도 숨죽여 그의 노래를 들었다. 드라마틱한 고음으로 음악이 끝나고, 가수는 그의 목소리를 사랑했던 세계인을 모두 끌어안는 듯 양팔을 넓게 벌렸다. 감회에 젖은 표정 위로 박수갈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이탈리아가 낳은 대작곡가의 아리아를, 역시 이탈리아가 배출한 세계적인 테너가 부르는 장면은 무척 상징적이었다. ‘모두 잠들지 말라’는 가사는 명승부를 실시간으로 보려 밤을 새울 지구 반대편의 시청자들에게, ‘승리하리라’는 올림픽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보내는 헌사와도 같았다. 이토록 적절한 선곡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 무대가 생전 마지막 공연이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음악과 이론을 곁들여     

푸치니는 오늘날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오페라 작곡가 중 한 명이다. 나 역시 그의 유명 아리아를 몇 개 알고 있었고 매우 좋아했다. 이번 푸치니 책도 이전 편들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그의 음악을 듣지 않고서는 푸치니를 얘기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푸치니의 가장 대표적인 아리아들을 링크해 두었으니, 독자분들은 시간적 여유가 허락하는 한 감상해 보시길 바란다. 또한 내가 책에서 알게 된 푸치니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정리해 두었으니 함께 읽어주시면 좋겠다. 어렸을 적 피아노 학원에서 흔히 경험해 봤듯, 실습에 이론을 더한 음악 감상 시간이 될 것이다.


라 보엠     

얼마 전 시트콤 <프렌즈>의 주역이었던 배우 매튜 페리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떴다. 그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자 페리가 연기한 캐릭터 챈들러를 좋아했던 난 그가 벌써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종영한 지 벌써 20년이 다 된 <프렌즈>는 이미 하나의 고전으로서 세계 팬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프렌즈>가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라 보엠>의 주인공들은 젊고 가난하고 장난기 가득한, 천둥벌거숭이 예술가들이다. 이 독신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생활과 연애,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황당무계한 소동 등이 <프렌즈>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 우리나라의 인기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이나 <뉴논스톱>은 <프렌즈>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친숙한 이들 청춘 시트콤은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오페라 <라 보엠>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라 보엠>은 푸치니 굴지의 히트작이므로, 여기서 줄거리를 간략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장소는 프랑스 파리, 시기는 크리스마스이브. 어느 하숙집에 화가 마르첼로와 시인 로돌포가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두 사람이 방이 춥다며 불평하던 중, 음악가 쇼나르가 눈 먼 돈을 벌었다며 의기양양해 들어온다. 세 사람은 집세를 독촉하려 온 집 주인을 어이없는 장난으로 내쫓아 버린다.

      

친구들은 인근 카페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낸다며 나가고, 로돌포는 잠시 후 합류한다며 혼자 남아 원고를 쓰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린다. 한 아름다운 여인이 촛불이 꺼져 불을 빌리러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몸이 좋지 않은지 갑자기 실신해 버리고, 잠시 후 정신이 든다.

     

촛불을 붙인 여인이 갑자기 방 열쇠가 없어졌다고 말하고, 그 순간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진다. 로돌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기 촛불도 꺼버린다. 어둠 속에서 열쇠를 찾는 두 사람이 손이 겹치고, 남자는 <그대의 찬 손>이라는 유명한 아리아를 부른다.

     

이후의 전개는 예상 가능할 것이다.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되지만, 미미의 병을 고쳐줄 돈이 없는 로돌포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헤어지려 한다. 아픔을 안고 헤어진 연인은 겨울과 봄이 지나가고서야 재회하나, 미미는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다. 슬픔에 잠긴 친구들과 로돌포가 지켜보는 앞에서 미미는 숨을 거둔다.


     

그럼 여기서, <라 보엠>의 대표 아리아인 <그대의 찬 손>을 들어보기로 하자.

          


<라 보엠>에는 푸치니의 히트작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성공 공식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한다. ‘푸치니 공식’이라고 하는 이 비법은 어떤 것일까?

     

1. 전반부의 분위기는 밝고 경쾌하다. 연인들의 사랑이 성립된다. 주요 주제들이 제시된다.

2. 중간부에서는 사랑에 위기가 닥치고, 남자는 무책임하거나 무능력하다. 이별이 이루어지거나 암시된다. 긴 시간이 흐른다.

3. 후반부에서 연인들은 다시 만난다. 그러나 분위기는 전반부와 반대다. 재회의 분위기는 어둡고 비극적이다. 전반부의 주요 주제들이 회상된다. 여주인공이 죽어간다.     


뭔가 90년대~00년대 우리나라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어도 꽤 흥행했을 것 같은 공식이지 않은가? 이런 대중성과 보편성이야말로 푸치니의 특기이자 장기였다.


토스카     

대중의 기호를 완벽히 장악하는 푸치니의 능력을 시기해서였을까, 아니면 비평가로서의 본분 때문이었을까. 당대의 음악평론가들은 잘나가는 푸치니를 깎아내리려 안달이었다. 다음 설명을 보자.                    

평론가들과의 불화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나가는 작곡가이자 ‘베르디의 후계자’로 선전된 푸치니가 치러야 할 세금이었다. 애국주의자들은 푸치니가 해외 경향들을 모방한다고 비난했고, 국제파들은 푸치니가 예전에 쓴 자기 작품들을 복제한다고 욕했다.

<토스카>에서 푸치니는 이 충고들을 받아들여 로마를 배경으로 한, 센티멘털리즘에서 벗어나는 작품을 썼지만, 이번에는 ‘프랑스적 타락’을 대표하며 그에게 맞는 소재로 아니라는 비난이 돌아왔다.여성 취향에서 간신히 몸을 돌리려 했지만 베르디 같은 남성적이고 힘 있는 극이 아니라 폭력만 배웠다는 것이다. 
- 클래식 클라우드 5, <푸치니 × 유윤종> 202p


푸치니는 대중과 평단 양쪽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오페라의 소재를 번갈아 택했다. 다음과 같은 패턴이다. 

    

라 보엠 – 감상적
토스카  - 남성적
나비부인 – 감상적
서부의 아가씨 – 남성적     

(세온의 개인적 의견 - ‘남성적’이라는 표현은 고정적인 성 관념을 연상시켜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어휘로 바꾸기에는 일개 독자인 저에게 전문성이 없다는 판단에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폭력적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던 <토스카>는 어떤 줄거리의 극일까?


 배경은 로마의 산탄드레아 델라 교회. 갓 탈옥한 정치범 안젤로티가 뛰어들어와 숨는다. 잠시 후 화가 카바라도시가 들어오고, 안젤로티는 도망치려다 상대가 친구 카바라도시라는 걸 알고 기뻐한다. 안젤로티는 자신을 숨겨줄 것을 친구에게 부탁하고, 카바라도시는 승낙한다.

     

카바라도시의 연인 토스카가 카바라도시를 부르지만, 그는 안젤로티를 숨기느라 지체한다. 질투심 많은 토스카는 애인이 다른 여자를 숨긴 게 아닐지 의심하며 연인을 닦달한다.

      

토스카와 카바라도시가 나간 뒤 경무총감 스카르피아가 부하들을 데리고 와 안젤로티를 찾는다. 부하들이 안젤로티가 먹은 음식을 발견하고, 스카르피아는 카바라도시가 안젤로티를 숨겨준 것을 짐작한다. 토스카가 다시 나타나자 스카르피아는 여인의 부채를 보여주며 애인을 의심하도록 부추긴다. 질투에 차서 카바라도시에게 달려가는 토스카를 스카르피아의 부하가 미행한다.

     

2막, 스카르피아의 부하는 안젤로티를 놓치고 카바라도시를 체포한다. 스카르피아는 안젤로티를 어디 숨겼냐며 카바라도시를 고문한다. 그 광경을 본 토스카가 참다못해 안젤로티는 별장의 우물에 숨어있다고 말해버리고, 카바라도시는 끌려 나간다.

     

스카르피아와 토스카만 남자 여인은 경무총감에게 연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스카르피아는 자기와 밤을 보내기를 요구한다. 절망한 토스카는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른다.

     

토스카가 몸을 바치기로 하는 대신 연인과 도망갈 수 있게 허가서를 써달라고 하자, 스카르피아는 허가서를 써준다. 토스카는 그 틈을 타 나이프로 그를 찌른다.

      

한편 처형을 앞둔 카바라도시는 토스카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와의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부른다. 그때 갑자기 토스카가 나타나고, 일의 전말을 들은 카라바도시는 희망을 가진다. 토스카는 총살 집행은 가짜이니, 죽은 척을 잘 하라고 당부한다.

     

총성이 울리고 카바라도시가 쓰러진다. 토스카가 연인에게 다가가 이제는 일어나도 된다고 말하지만 카바라도시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스카르피아가 약속을 어기고 진짜 총살을 지시한 것이다. 비탄에 찬 토스카는 스카르피아, 신 앞에서 만나자! 라고 외치며 성에서 몸을 던진다.


말그대로 잔인하고 슬픈 비극이다. 두 연인의 처참한 말로에 가슴이 아려온다. 카바라도시의 애통한 마음을 담은 걸작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감상해보자.          

       



나비 부인     

슬프기로는 이번 작품도 못지않다. 역시 푸치니의 대히트작인 오페라 <나비 부인>이다. 이 극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파병된 병사와 현지처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 핑커톤은 일본에 파견된 해군 장교로, 게이샤 초초상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혼례 중 초초상은 한때 유복했으나 가세가 기울어 기생이 되었음을 설명하고, 부친이 할복자살했던 단검을 꺼내 보인다.

     

3년이 지나고, 핑커톤은 결혼 후 항해를 떠나 소식이 없다. 초초상은 남편이 돌아올 것으로 믿는 아리아 <어떤 갠 날>을 부른다. 초초상에겐 이미 핑커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까지 있다.

    

드디어 핑커톤이 일본에 돌아오고, 이를 안 초초상과 아들은 꽃으로 집을 치장하고 핑커톤이 돌아오길 기다리지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채로 밤은 저물어 간다. 꼿꼿이 앉아 남편을 기다리는 초초상을 배경으로 항구의 수병들이 부르는 허밍코러스가 들린다.

     

날이 밝고, 초초상은 핑커톤이 미국에서 다른 여자와 재혼했음을 알게 된다. 체념한 그녀는 아들을 그에게 넘겨주기로 하고, 아버지의 단검으로 할복을 실행한다.


     

<나비 부인> 역시 <라 보엠>처럼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뮤지컬 <미스 사이공>이다. <미스 사이공>은 배경이 일본이 아닌 베트남인 것만 빼면 대부분의 굵직한 서사는 <나비 부인>과 비슷하다.

     

나는 <미스 사이공>의 주요 넘버를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팅으로 처음 접했다. 김연아의 미스 사이공 프로그램은 <죽음의 무도>나 <007>, <레 미제라블>처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꽤 매력적인 작품이다. 초반과 후반의 파워풀한 기술과 대표 넘버인 <Sun and Moon>에 맞춘 서정적인 연기가 훌륭하다. 한편 일본 선수들은 자주 <나비 부인>의 음악을 프로그램으로 선정했는데, 대부분 <어떤 개인 날>의 아름다운 선율이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도록 안무를 짰다.

      

푸치니는 앞서 언급한 평론가들의 질타를 피하기 위해 당대 앞선 음악으로 받아들여지던 프랑스의 사조를 <어떤 개인 날>에 반영했고, 이를 책에서는 ‘드뷔시에서 영감을 빌려온 몽환적인 화음(242p)’이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음악을 들어보면 그 몽환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느낄 수 있다. 오페라 역사상 손꼽히게 고운 선율인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을 감상해보자.

     


푸치니는 열 편이 넘는 오페라를 썼지만, 내가 브런치에 소개하고자 하는 작품은 총 네 편이다. 그중 이제 하나만이 남았다. 이미 분량이 많이 길어졌으므로, 마지막 작품은 새 글로 발행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저자도, 독자인 나도 할 말이 너무 많은 그 오페라의 이름은 <투란도트>다.

     

※오페라의 줄거리는 <푸치니 × 유윤종> 책에 실린 글을 요약하고 가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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