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온 Nov 12. 2023

차라투스트라가 대체 뭐라고 말했길래

클래식 클라우드 세 번째 책, 니체

드디어 철학이다. 미술(클림트)와 문학(셰익스피어)보다 훨씬 어려워 보이는 니체다. 나는 제목만 보고서 겁을 집어먹었다. 과연 철학서를 읽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처음부터 냅다 본론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부담감도 덜 겸 음악과 영상으로 출발해보는 것이 좋겠다. 2분짜리 짧은 영상이니 독자분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봐주시길 바란다. 그 유명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이다. 니체 관련 글을 쓰려니 문득 이 영화를 봐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상에서 뼈 무기(?)로 짐승의 뼛조각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유인원의 모습은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를 연상시킨다. (물론 그는 자신을 유인원보다는 훨씬 멋지고 위대하게 생각했던 듯하지만) 그리고 흐르는 바로 그 음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우리를 강타한다. 팀파니의 저 웅장한 리듬에서도 역시 망치질이 떠오른다.

     

유튜브에서는 이 음악과 함께하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짧고 굵은 오프닝도 볼 수 있다. 금관의 우렁찬 연주 속에 지평선을 뚫고 떠오르는 해가 등장하는데, 이 또한 니체 철학을 시각 ․ 청각적으로 아주 훌륭하게 형상화한 장면이다. 자신이 사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한 니체의 자부심이 전해져오는 듯하다.

     

스스로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니체가 만약 슈트라우스의 이 교향시를 들었다면 어떻게 평가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자기의 사상을 압도적으로 표현했다며 기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음악이 발표되었을 때 니체는 정신착란으로 입원한 지 오래였다.



사유하며 걷는 길

(여기서부터의 인용문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니체 원전에서 따온 것은 초록색, 이진우 교수님의 해설은 파란색으로 표기하겠습니다!)

    

클래식 클라우드의 세 번째 책의 저술은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 니체협회 회장을 역임한, 그야말로 니체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진우 님이 맡았다. 그는 알프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철학자가 실제로 밟았던 길을 따라 산책하며 깊은 사유를 펼친다.


특히 저자의 여정 대부분은 알프스에서 이루어지는데, 니체가 스위스의 쥘스 마리아를 일곱 번이나 찾았고 끊임없이 산을 오르고 걸으며 사상의 핵심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니체의 철학을 책상에 앉아서가 아니라 걸으면서 음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정신과 이성 중심의 서양 사상사를 비판하고 몸과 본능의 중요성을 설파한 니체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니체의 사상이 길 위에서 태어난 만큼 저자 역시 부지런히 길을 따라 걷는다.

    

그 난해하고 적막한 길을 따라가는 나의 독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웠다. 몇 년 전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었던 것이 기억났다. 정말 마의 책이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충동이 일었다.

      

니체의 사유든 이진우 교수의 사유든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니체의 철학은 칸트와 헤겔의 것과는 달리 논리적으로 일관된 통일된 사상 체계가 아니라고 하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기승전결에 익숙해진 내겐 의식의 흐름과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글이었다. 책을 다 읽은 후 여러 자료를 참고해 보충학습을 하고 나서야, 거대하고 도도한 사유의 강물과도 같았던 그 흐름 속에 니체의 핵심 사상이 다 들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니체의 철학을 ‘느끼려면’그의 철학과 관련된 어떤 용어와 개념도 잊어야 한다고 한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사실 이러한 공부는 방향이 틀렸다. 본능과 직관을 중시한 니체의 철학은 이해하면 안 되고 느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전자보다 후자의 접근법이 더 쉬웠다. 이 또한 니체가 그토록 통렬히 비판한 서양 사상사의 주류대로 교육받아서일지도 모른다. 니체 본인이 알았다면 망치를 들고 날 쫓아왔을 일이다.



니체 원전에 도전하다

아무튼 참고도서를 통해 습득한 바에 따르면, 니체의 저서 중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것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긴 하지만, 아무 배경지식 없이 그 책부터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상징과 비유가 너무 많이 들어있어 오히려 가장 나중에 읽어야 할 책이 차라투스트라란다.

    

대신 일종의 자서전과 같은 <이 사람을 보라>를 먼저 읽으면 좋다고 했다. 니체가 자신의 생애와 저작을 간략하게 개관하고 해설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니체 원전에의 도전을 <이 사람을 보라>로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도서관에서 번역서를 빌렸다. ‘지식을 만드는 지식’, 줄여서 ‘지만지’로도 알려진 고전 번역 시리즈에 속해 있는 얇은 책이었다.

     

두께만 보고 안도했던 나는 그러나 책을 펼친 순간부터 좌절했다. 그 속에 담긴 사상이 너무 두터웠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인지 활자를 감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원전에 도전한 성과가 아예 없진 않았으니, 클래식 클라우드 책으로 배운 것을 니체 본인의 언어로 확인했다는 점이다. 마치 역사를 공부할 때 개론서에서 익힌 사실을 사료를 통해 확실히 하는 과정 같았다.

     

이렇게 나름대로 약간의 공부를 하긴 했지만, 브런치에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교수님이 책을 통해 해설해 준 니체의 철학을 단순히 요약 ․ 정리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듯했지만, 내게 그 이상의 해석이나 설명을 덧붙일 능력이 있지도 않았다.

     

고민 끝에 이번 글은 니체의 철학을 접하고 내가 느낀 점, 즉 니체가 내게 시사한 바를 담아 써보기로 했다. 비록 니체 사상의 아주 일부분만을 다루게 되겠지만, 그 점에 관해 독자분들과 토론을 나누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착한 사람은 되지 말자

내가 니체의 사상에서 직관적으로 받은 인상은 ‘강인함’이다.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 상식적인 도덕을 약한 자를 위한 도덕이라 매도하며 비도덕주의자를 자처했다.


나는 이제까지 최고의 유형으로 여겨져 왔던 인간 유형, 즉 선한 인간, 자애로운 인간, 선행하는 인간을 부정한다.

        

좋은 것은 무엇인가? 권력의 감정, 권력에의 의지, 인간 안에서 권력 그 자체를 증대시키는 모든 것.

나쁜 것은 무엇인가? 약함에서 유래하는 모든 것.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니체가 이렇게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 이유는 그가 도덕에 반하는 악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정치적인 권력을 탐해서도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주체성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도덕에 주눅 들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진우 교수님의 해설도 함께 읽어보자.



사람은 본래 최고로 강력하고 화려한 인간 유형을 실현하고자 한다. 도덕은 그 실현 수단일 뿐이다. 경직된 도덕이 삶의 원천인 권력에의 의지를 봉쇄할 때, 선하기만 한 사람은 단지 퇴행과 퇴폐의 징후일 뿐이다. 그는 기존의 도덕에 순종할 뿐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니체는 삶의 근본 충동을 권력에의 의지로 파악한다. 이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면 권력에의 의지에 기여하는 것은 선한 것이고, 권력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여기서 권력에의 의지는 삶을 강화할 수 있는 허구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일반적인 도덕관에 따르면 나는 선한 사람이다. 살면서 언제나 정직하고 올바르며 성실하게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겨왔다. 청소년기에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가르침에 문제 제기 한 번 해본 적 없이 순종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이런 나는 진정으로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 기백과 패기가 부족한 ‘최후의 인간’, 즉 ‘초인’과 정반대되는 인간일 뿐이다. 그동안 나를 세뇌한 가치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여 안온한 삶만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명령보다 순종이 쉽고 익숙했다. 명령을 하려면 그 주체가 먼저 명령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그 자신감이 없었기에 나는 명령하며 살지 못했다. 철학적 차원까지 갈 것도 없이 일상생활에서도 나는 명령이 꼭 필요할 때, 즉 내 주장을 꼭 관철해야 할 때조차 명령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순종의 길만을 걸으며 스스로의 나약함에 면죄부를 주어 왔지만, 언제나 순종보다는 명령이 어렵게 마련이다.


그러나 내가 들은 세 번째의 것은 이것이다. 즉 순종보다 명령이 어렵다는 것이다. ... 내가 보기에 모든 명령에는 시도와 모험이 따른다. 그리고 명령을 할 때 생명체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거는 모험을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강인함을 추구하는 니체의 사상은 유명한 ‘위버멘슈’, 즉 ‘초인’이라는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아, 너희 인간들이여. 돌 속에 하나의 형상이 잠자고 있다. 형상들 중의 형상이 말이다! ... 이제 내 망치가 이 형상을 감금하고 있는 감옥을 격노하여 내리친다.

      

디오니소스적 과제를 위해서는 망치의 강함과 파괴할 때의 기쁨 자체가 그 결정적인 전제 조건이 된다. “강해져라!”라는 명령, 그리고 모든 창조자는 강하다는 가장 기본적인 확실성이 디오니소스적인 본성의 가장 특징적인 표시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자기를 넘어서고 극복하는 초인은 약하고 선한 존재가 아니다. 강하고 파괴적이다. 니체가 자신을 ‘다이너마이트’라고 칭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며, 인간을 감금하는 감옥을 파괴하는‘망치’또한 파괴적 이미지다. 나는 니체 철학의 이런 점에서 내면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공격성을 발견했다.



고통과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기

니체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감을 준 장소를 방문했을 때의 저자(이진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엥가딘의 수를레이 바위에서 니체가 영감을 얻은 것이 ‘영원회귀’사상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세상의 온갖 문제를 뛰어넘은 것 같은 해발 1800미터의 고산 지대에서 깨달은 통찰은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다른 삶을 살아보기를 원한다. ...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이러한 문제들은 무한히 반복된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 사상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에 관한 사상이다. 무엇이 동일한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삶 자체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영원한 회귀, 그렇다면 삶의 회의하고 부정하게 만드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너는 너의 삶을 여전히 살고자 원하는가?”


니체는 종종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염세주의적인 철학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사상에는 삶에 대한 긍정이 넘쳐흐른다. 영원회귀라는 개념에서도 마찬가지로 삶을 있는 그대로,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니체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렸다. 심한 두통과 실명에 가까울 정도로 악화된 시력은 글을 읽고 쓰는 일조차 힘겹게 만들었고, 자신의 사상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의 냉랭한 반응을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니체는 이런 삶의 고통까지도 있는 그대로 긍정하려 했다. 그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우나, 반복되는 삶에서 고통을 단순히 피하거나 견디기보다는 고통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니체의 글 중에 제일 좋아하는 글귀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답한다고 한다.

"너의 삶을 다시 살기를 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살아라!"


그렇다면 우리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며 현실에 불평불만을 갖기보다는 지금 현재의 삶을 다시 살기를 원할 정도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 니체의 이러한 가르침은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직면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과연 맞게 생각한 걸까?

     

이 영원회귀 사상은 니체 철학의 핵심이지만 동시에 가장 어렵고 심원한 통찰이며, 본인이 그 개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기에 지금도 매우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영원회귀 개념을 너무 평이하게만 이해했다는 찜찜함을 떨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니체의 철학에는 짧은 시간 동안 이해하기엔 도저히 불가능했던 부분, 그래서 의문이 들었던 부분이 많았다.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다.

     


더 공부해볼 것

    

니체가 기존의 가치를 깨부수는 가치 전도를 통해 제시하는 새로운 가치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귀족적 가치’라고 표현되는 이 가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니체는 삶의 고통조차도 꼭 필요하며, 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로 최악의, 인간이 견딜 수 없을 만한 고통까지 긍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면 영화 <밀양>에서 신애(전도연 분)가 겪는 고통도 의미가 있는 것인가? 과연 신애가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사람을 보라>를 빌리러 도서관에 갔을 때, 서가의 철학 분야는 무려 세네 단에 걸쳐 니체가 점령하고 있었다. 근처의 다른 사상가들보다도 압도적으로 많은 양이었다. 이는 예술가나 철학자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니체의 철학을 자주 찾는다는 얘긴데, 사람들이 니체에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니체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유했을까? 자신의 사상으로 인류를 거짓된 진리에서 구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까?

  

 나중에 니체의 사상을 더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나면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다. 책세상 출판사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해설서다. 차라투스트라는 앞서 말했듯이 상징과 비유로 때문에 해설서 없이는 온전히 읽어내기 힘들다고 한다. 이 책과 함께 다시 니체를 공부한다면 앞의 질문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본다.

  

<절규>로 유명한 뭉크가 그린 니체의 초상화. 뭉크는 니체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의 저작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전 02화 셰익스피어 성덕의 철학적 문학 기행 읽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