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온 Nov 05. 2023

셰익스피어 성덕의 철학적 문학 기행 읽기

클래식 클라우드 두 번째 책, 셰익스피어

총 100권을 목표로 하는 장대한 기획물, 클래식 클라우드의 첫 번째 주인공은 셰익스피어다. 나는 거장의 목록에서 그의 이름이 맨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과연 저자는 셰익스피어를 어떻게 해설할까? 이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이미 너무 많은 전문가와 애호가들이 해석, 분석, 감상을 발표해왔다. 거기에 또 무슨 말을 보탤 것이며 어떤 설명을 더할 것인가.

     

나는 다음의 문단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은 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에 담긴 장소들에서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한 것을 떠올리며 쓴 것이다. 그러니 나 자신의 느낌과 사유가 깊이 침투해있고, 그런 만큼 단순한 안내의 글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언급한 ‘나 자신의 느낌과 사유’가 곳곳에 보였는데, 그 지점이 바로 셰익스피어 평론서로서 이 책의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행기와 추억담, 희곡의 강물

     

우선 먼저 읽었던 시리즈 세 번째 책인 클림트 편과 비교하면, 이번 편이 더 여행기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발자취가 어린 장소를 여행하면서 느낀 감정과 떠오른 상념들을 예술적인 문장으로 풀어내었다. 특히 여행 중 자주 즐겼던 사색의 시간을 묘사한 부분이 아름다웠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작품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는 점이다. 저자 황광수라는 분은 철학과를 졸업하고 유수의 출판사, 잡지사에서 편집자와 주간을 역임했는데, 이런 학문적 바탕 때문인지 책에 철학적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실수 연발>이라는 희곡을 설명할 때 저자는 헤겔과 칸트, 지젝의 이론을 동원한다. 또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의 분석에서는 헬레네를 가치와 무관한 ‘존재 자체’ 로 보는 크레시다・ 판다로스와, 일종의 ‘가치’ 로 보는 트로이의 두 왕자를 비교함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인정하는 쪽과 아닌 쪽의 대립이라는 틀로 등장인물을 설명한다.

     

다행히 본문에는 이렇게 난해하고 추상적인 분석뿐 아니라 저자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좋아하며 느낀 순수한 기쁨과 소소한 추억담도 실려있다.


첫머리부터 어린 시절 지방에 살다가 갑자기 서울로 이사 오게 되어 느꼈던 외로움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며 이겨냈던 이야기가 나온다. 고등학생 때는 맥베스의 긴 독백을 원문으로 달달달 외울 정도였다고 했다. 그랬던 분이 저명한 문학평론가가 되어 셰익스피어를 주제로 여행기를 쓰게 되었으니, 요즘 말로 ‘성덕(성공한 덕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열렬한 팬답게 이 책 한 권에서 셰익스피어 희곡을 36편이나 소개했다. 이는 총 38개(문학과지성사 전집 기준)에 달하는 희곡 중 단 2편만이 빠진 것이다. 특히 후반부 이탈리아 여행기에서는 무한히 풀려나오는 실타래처럼 새로운 작품이 끊임없이 등장해서, 꼭 희곡의 강물을 떠내려가는 배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

     

앞에서 이야기했듯 독후감을 써야 할 책에 저자의 개인적 사유와 개성이 강하게 담겨 있다 보니, 나는 ‘단순한 안내의 글’ 도 읽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기본 자료로 가장 적합해 보인 것은 집에 있던 백과사전이었다.

     

내가 삼십 년 가까이 소중히 간직해온 학습백과에는 왜 현대인인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간략하면서도 효과적인 설명이 들어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400년 전의 관객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극을 썼지만 그 극들은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도 변함없이 감동을 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이처럼 오랫동안 폭넓은 사랑을 받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본성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제대로 표현해낸 작가의 능력이다.


셰익스피어는 개개인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을 그려냈다. 그렇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한 인물들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우리가 문학 시간에 배웠던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아주 높은 차원에서 성취했다는 말이겠다.

      

백과사전에는 배경지식으로 알아두면 좋을 내용도 있었는데, 셰익스피어 시대 영국의 상황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문화 ․ 사회 ․ 정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유령이나 마녀, 마법사 등의 존재를 믿고 있었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것들을 작품 속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16세기 말에 셰익스피어가 희곡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영국인들은 삶에 대해 낙관하는 경향이 있었다. 1588년에 영국 해군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물리치자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아래 안정적으로 살던 영국인들은 더욱 안정감을 갖게 되고 애국심이 고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주의는 급속히 퇴색하여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한 1603년 무렵에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닥쳐왔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보면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가 이렇게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 옮겨간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과사전에 실린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장 도면을 클래식 클라우드 셰익스피어 편에 실린 사진과 함께 보니, 당시의 극장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나도 독자분들의 이해를 위해 도면과 사진을 다음과 같이 나란히 첨부해보겠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장 도면과 현재 남아있는 극장의 실제 사진

     

한편 셰익스피어가 문학뿐 아니라 미술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클래식 클라우드 책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한 희곡이 소개될 때마다 그것을 주제로 한 명화가 함께 등장하는데, 거의 모든 희곡에 명화가 짝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랫동안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그만큼 잘 알려져 있었으며 높은 인기를 누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셰익스피어 희곡 엿보기

     

책에서 소개된 36편의 희곡은 모두 저마다의 매력이 넘쳤지만, 그중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을 여기에 조금만 옮겨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는 <베니스의 상인>이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한 저자의 해설을 읽고 깜짝 놀랐다. 샤일록과 안토니오라는 인물을 이제껏 내가 알고 있던, 혹은 배워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샤일록을 피도 눈물도 없는 악한 고리대금업자로, 안토니오를 가련한 피해자로만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안토니오에게 살을 요구하기 전, 샤일록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나를 개라고 했어요.” 그러자 안토니오가 내뱉는다. “지금도 당신을 그렇게 부르고 싶어. / 다시 당신한테 침을 뱉고, 걷어차 버리고 싶어.


    

안토니오와 그의 친구 일당은 샤일록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가 귀중한 딸과 재물을 함께 잃어버렸을 때조차 그를 모욕하고 희롱했다. 그러니 안토니오의 살을 달라는 샤일록의 엽기적인 요구는 반유대주의에서 비롯된 원한과 고통의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뿐 아니라 그동안 지혜로움의 대명사로 알고 있었던 포샤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진다.


법의 대의에 비추어보면 (중략)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정확하게 살 1파운드만 베어내라는 주장은 억지일 수밖에 없다. 포샤는 법의 대의를 무시하고 법조문에서 작은 틈새를 찾아내 안토니오를 그 사이로 빠져나가게 해준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 배운 <베니스의 상인>의 교훈은 반유대주의자들의 입장을 답습한 것이었다는 말일까? 나는 이 주제를 추후 더 공부해 보리라 다짐했다.

     

다음은 그 유명한 <햄릿>이다. 나는 오래전 <햄릿>의 완역본을 앞부분만 조금 읽었을 뿐이지만, 햄릿이 부왕의 유령을 만나는 장면의 으스스함이 너무 좋았었다.

      

연극으로도 꼭 관람해보고 싶었으나 지방에 살다 보니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햄릿>의 독백 또는 방백들이 고뇌로 가득하면서도 세련되고 우아하다는 저자의 설명을 읽고 나니 몇 년 안에 꼭 한번 연극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햄릿>에 대한 여러 가지 비평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데, 주로 햄릿의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이라고 알려진 ‘복수의 지연’에 관한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공백을 풍부한 시적 언어와 교묘한 말장난, 재기발랄한 대사들을 펼쳐가면서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타락한 현실, (중략)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층적으로 성찰하는 데 활용했다.


     

이 의견에 따르면 햄릿이 복수를 서두르지 못한 것은 유약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이 시간적 공백을 통해 (단지 복수심만이 아닌) 삶과 죽음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언어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햄릿이 선택장애 환자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대목을 읽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는 정말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분량이 매우 길어졌다는 걸 알지만 한 작품만 더 얘기해보겠다. 희곡 전체를 다 읽었기 때문에 빼기엔 너무 아깝다. 바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다.

     

그래도 셰익스피어 관련 책에 대한 글인데 희곡 한 편 정도는 다 읽고 나서 써야 할 것 같았고, 익히 알고 있는 역사 인물의 이야기이니 줄거리를 따라가기 쉬울 것 같아 이 작품을 골랐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물론 그 시기의 역사 자체가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그걸 풀어내는 셰익스피어의 이야기 솜씨가 대단했다. 분량이 길어서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시작하자마자 빠져들어서, 앉은 자리에서 금방 끝까지 읽어 치웠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했던 옛날 영화도 떠올랐고, 장면장면이 생생하게 상상되어 더 즐거웠다.

     

흥미로운 것은 셰익스피어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을 진실로 고귀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묘사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줄곧 안토니우스를 로마를 버린 배반자로, 클레오파트라를 영리한 정치가로 생각해왔기에 이 부분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악티움 해전에서는 두 사람 말고 옥타비아누스의 편을 들고 싶었다. 이 또한 서양 우월주의적 사관으로 역사를 배운 결과인 걸까?

     

그건 그렇고 변화무쌍한 비유와 풍성한 감정 표현은 왜 셰익스피어가 최고인지 알 수 있게 했다. 그중 몇 개의 구절만 옮겨보겠다.



안토니우스 :

자, 모두 손을 잡읍시다,

정복자 포도주가 우리의 감각을

아늑하고 향긋한 망각의 강물 속에

푹 빠뜨릴 때까지.

(‘다 같이 취할 때까지 마시자’를 매우 품위있게 표현함.)


    

이노바부스 :

그렇다면 세상이여, 너에겐 두 턱만 남았으니

네가 가진 음식을 그 사이에 다 던져도

이쪽이 저쪽을 갈아없앨 것이다.

(로마의 3두 중 레피두스가 실각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결전이 벌어진 것을 예감한 말)

  

클레오파트라 :

아 여보, 만약에 그렇다면

차가운 내 마음속에 하늘은 우박 심고

그것이 생길 때 독을 넣어 첫 번째 얼음 돌이

내 머리에 떨어져라. 또 그것이 녹으면서

생명도 사라져라! 나의 다음 아들을 내리쳐라,

그래서 내 자궁의 기억물인 자식들이 점차로

나의 멋진 이집트인 모두와 더불어

이 알갱이 폭풍의 해빙으로 무덤 없이

땅에 누울 때까지, 나일 강 파리와 등에가

그들을 덮쳐서 먹어치울 때까지!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마음을 의심하자 클레오파트라가 사랑의 확신을 주며 하는 말)


정말 마지막으로, 내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읽은 판본은 민음사에서 나온 셰익스피어 전집인데, 원작이 실제 연극 대사로 쓰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말’의 운율을 살려 번역하였다고 한다. 소리 내어 읽어보면 신기하게도 일정한 리듬이 느껴진다. 독자분들도 한번 이렇게 읽어보시길 바란다.                                                  

이전 01화 그의 찬란한 황금빛은 어디서 왔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