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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Dec 03. 2023

노벨문학상 수상자도 훌륭하지만은 않았다

클래식 클라우드 여섯 번째 책, 헤밍웨이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헤밍웨이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와 같은 대표작의 제목도 작가명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다. 독서 좀 한다 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봤을 작품들이다. 그 중엔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작도 있다.

     

그래서 이번 <헤밍웨이 × 백민석> 편은 위대한 작가에 대한 찬사와 동경이 주를 이룰 것이라 예상했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저자는 본인도 소설가임에도 불구하고 숭배와 존경이 아닌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헤밍웨이를 파헤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전설적인 명성에 가려진 헤밍웨이의 인간적인 측면을 알게 되었다.


산산이 깨진 환상

     

헤밍웨이에 대한 내 막연한 선망을 가장 먼저 깨뜨린 것은 그의 극심한 마초성이었다. 저자는 이를 ‘남근중심주의’라는 용어로 부른다. ‘남성을 중심에 놓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여성을 주변부로 놓고 하찮은 역할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소설에서 남성은 대체로 거칠고 폭력적이며 승부에 목숨을 거는 ‘상남자’ 그 자체이고 반대로 여성은 이런 남성의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는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존재다. 특히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칭찬하며 기를 세워주는데 이때 단골로 등장하는 대사가 ‘난 당신의 여자예요’이다.

     

전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었을 때, 소설이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음에도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대화가 느글느글해 속이 불편했었다. 그 느끼함이 이런 마초성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다.

     

헤밍웨이가 활동한 건 20세기 초중반이었으니 시대상을 고려하면 당연한 게 아니냐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대 작가와 비교해도 남성성에 대한 헤밍웨이의 집착은 유별났던 것 같다. 오죽하면 남근중심주의 또한 그가 남긴 문학적 유산이라고 할까. 이에 대해선 다음 파트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그외에 책을 읽으며 떠오른 헤밍웨이의 이미지는 ‘소중한 사람조차 함부로 대했던 무례하고 오만하고 무모한 인간’이다. 그는 총 네 명이나 되는 아내를 두었지만 그중 누구에게도 꾸준히 잘하지 못한 데다, 헌신적이었던 네 번째 아내에게 얼마나 횡포를 부렸는지 저자는 차마 다 옮겨적을 수 없다고 했다. 동 작가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를 두고 역작을 쓸 때마다 여자를 갈아치운다는 식으로 표현했는데 그의 연보를 살펴보면 맞는 말이다.

     

헤밍웨이는 친어머니와도 심하게 싸웠으며 한때 절친했던 친구를 욕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피츠제럴드 주요 먹잇감이었고 (위대한 개츠비를 쓴 그 피츠제럴드 맞다) 다른 작가들에게도 비난을 퍼부었다.

    

나는 이런 인간성에 더해 헤밍웨이가 즐겼던 어떤 문화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됐으니, 바로 투우이다.

     

헤밍웨이는 미국인이지만 라틴 문화에 대한 애정이 강해 스페인과 쿠바에 오래 거주했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으며, 투우사로 경기에 참가한 적이 있을 정도로 투우에 열광적이었다. 헤밍웨이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데 투우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며 그가 남긴 책 중엔 세계 최초의 투우 연구서도 있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저자가 실제로 스페인에 가서 경기를 관람하고 묘사한 투우는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아슬아슬하게 소 피하는 게임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는 거의 무조건 투우사의 손에 죽도록 결정되어 있다. 그것도 투우사가 상대하기 쉽도록 일부러 단계적으로 다치게 한 후에 죽인다. 처음엔 등을 찌르고, 다음엔 어깨를 찔러 약하게 만든 후 대동맥을 찔러 죽이는 것이다. 심지어 경기 전 소를 흥분시키기 위해 24시간 동안 완전히 빛이 차단된 암흑의 방에 가두어 놓는다고 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저자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고 서술한 장면은 잔인할 뿐 아니라 몹시 슬펐다. 경기장에 끌려 나온 소가 자기가 죽을 운명임을 깨닫고 싸움을 포기한 것이다. 등과 어깨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소들어온 문을 향해 걸어가다(도망친 게 아닐까) 잠긴 문 앞에서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렇게 아무 잘못 없는 동물은 달려든 투우사에게 결국 죽임을 당했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소가 너무 불쌍해 가슴이 미어졌다. 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관중들은 오직 사람의 재미 위해 싸움소로 길러지고 강제로 도발 당하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저 가엾은 동물을 보고 슬프지 않은 걸까?

      

잔혹성 때문에 오늘날 스페인 일부에서 투우 중계가 금지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즐기는 그 나라의 전통문화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문화상대주의를 무시하며 보신탕을 혐오하는 서양인들과 똑같은 생각에 빠진 걸까? 마음이 무거웠다.



 헤밍웨이의 소설 미학

    

인성에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 도덕적인 사생활과는 거리가 먼 헤밍웨이였지만 그가 대단한 작가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이 대체 어떻기에 그토록 칭송받는 것일까?

     

1. 입말체 대화법

헤밍웨이의 소설에서 대화문은 매우 간결하고 현실적이다. 책에서 인용된 <태양은 다시 뜬다> 속의 대화를 그대로 옮겨 보겠다.

     

“너무 취하지 마, 제이크. 그럴 필요 없어.”

“어떻게 알아?”

“그러지 마. 괜찮을 거야.”

“난 취하려는 게 아냐. 술을 좀 마시고 있을 뿐이지. 술 마시는 걸 좋아하니까.”

“취하지 마.” 그녀가 말했다. “제이크, 취하지 마.”

“드라이브할까?” 내가 말했다. “드라이브하면서 시내 구경 좀 할까?”

“좋아.”브렛이 말했다. “나 마드리드 구경을 못 했어. 마드리드를 제대로 봐야겠어.”

“이건 끝내고.”내가 말했다.

(...)

“아, 제이크.”브렛이 말했다. “우리 함께 정말 잘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

“그래.” 나는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겠지?”

<태양은 다시 뜬다>, 336~337쪽     

대화 부분을 보면 두 줄을 넘어서는 대화가 없다. (...) 대화는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입말체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된 대화문이다.

     

현대 소설에 익숙한 우리에겐 이 대화문이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이제는 레이먼드 카버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현대 작가들도 헤밍웨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대화문을 쓴다고 한다.

    

2. 빙산 이론

헤밍웨이는 일정 부분 이야기를 생략해 그 공백을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기기를 좋아했는데 이를 빙산 이론이라고 한다. 앞의 대화문은 놀랍게도 소설의 결말부임에도 화려한 진술도, 극적인 사건도 없다. 인물들이 하는 일이라곤 택시를 타는 것뿐이다.

      

그러나 소설을 처음부터 읽어 결말에 이른 독자라면 이런 극도로 절제된 장면에서조차 많은 서사를 떠올리고 인물들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빙산처럼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보다 감춰진 이야기가 더 많기를 바랐다.

     

이 이론은 잘만 활용하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해 소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므로, 현대의 소설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기법이다. 그러나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이렇게 과감하게 이야기를 생략한 소설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헤밍웨이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끼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하루키는 거대한 팬덤을 보유한 인기 작가이자 노벨상에 이름이 오르내릴 만큼 문학성을 인정받은 소설가이기도 하므로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특히 나도 읽어 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의 제목 헤밍웨이의 단편집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하루키가 10대 시절이었을 60~70년대에 헤밍웨이의 명성은 절정에 달해 있었고, 그가 좋아한다고 밝힌 미국 남성 작가들은 헤밍웨이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니 하루키라는 이름이 헤밍웨이의 문학적 계보에 오른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또 하루키 소설에서 이야기의 생략이 많은 점과 관념어와 추상적인 단어를 배제한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입말체는 모두 헤밍웨이의 미학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현시점 세계 최고의 작가 반열에 드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헤밍웨이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은 문학계에서 그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게 한다.

    

3. 하드보일드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대해서는 유명한 영문학 번역가이신 김욱동 교수님이 설명한 내용이 책에 실려 있으니 함께 읽어보자.

     

① 헤밍웨이는 감정을 최대한으로 억제한다. 감정을 억제하기에 오히려 그의 문체에는 힘과 박력이 있다.


② 헤밍웨이는 글을 쓸 때 낱말 하나도 무척 주의를 기울여 선택하였다. 좀더 구체적이고 감각적일뿐더러 충격적이고 투박한 성격이 강한 토착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③ 헤밍웨이는 되도록 형용사나 부사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④ 헤밍웨이는 무엇보다도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된 평서문을 즐겨 구사한다. 주어와 동사의 관계로 이루어진 단문을 즐겨 쓴다. 또한, 단문과 단문을 등위접속사로 대등하게 연결하는 중문을 주로 사용한다.


⑤ 반복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단순히 반복한다기보다는 의미를 조금씩 보강하는 점층법을 구사함으로써 주술적 효과를 노린다.


⑥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은 어떤 작가의 작품보다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다.

     

이런 기법은 인간적인 감정이 극도로 절제된 악인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하므로 주로 범죄소설과 느와르 영화에 널리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나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이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도 헤밍웨이의 유산에 기댄 것이라 하니, 현대 문학에 그가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④ 남근중심주의 미학     

앞에서 언급한 헤밍웨이의 남근중심주의가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도 하루키와 함께다. 저자는 헤밍웨이나 하루키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작품에 남근중심주의의 특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한다. 다만 하루키는 헤밍웨이와 달리 훨씬 온건하게, 교묘한 솜씨로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우위를 주장하는 견해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 거부감을 느끼는 편이다. 저자 또한 헤밍웨이의 남근중심주의를 내내 비판 조로 설명해서 혹시 여성일까 궁금했는데 남성이었다. 그에 따르면 많은 남성들도 헤밍웨이가 강조하는 남성성을 불편해하고 탐탁치 않게 여긴단다.

      

그런데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클래식 클라우드 책과는 전혀 달리 헤밍웨이 소설의 전형적인 남성형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폭력과 파괴에 용기 있게 대항하는 '헤밍웨이의 영웅'이라고 부르는 남성의 유형을 창조했다.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품위, 즉 위험한 상황에서도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행동은 헤밍웨이 법전이라고 알려진 원칙의 하나이다.


적어도 후배 남성 작가들이 헤밍웨이의 남성상을 왜 동경하고 본받으려 했는지는 알 것 같다.


고통과 질병의 역사 그리고 자살

     

헤밍웨이가 열광했던 위험한 여흥은 투우만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목숨을 거는 위험천만한 일에 뛰어들어 큰 부상과 병을 얻은 경험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저자는 학생들에게 헤밍웨이를 가르칠 때 가장 먼저 이 신체적 고난의 역사를 읊어준다고 한다. 60세 넘어까지 살아있었다는 게 신기한 그 내용을 나도 옮겨 적어보고자 한다.

    

어렸을 때 막대기가 목구멍에 걸린 채 넘어져 편도선이 잘려 나감

낚싯바늘이 걸려 등이 찢어짐

태어날 때부터 왼쪽 시력에 문제가 있었는데 이후 계속 찔리고 긁히는 듯 눈을 다침

1차 세계대전에 나가 뇌진탕을 일으키고 다리를 크게 다쳤으며 입원해서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황달에 걸림

말라리아에 걸리고 탄저병에 감염됨

한겨울 찬물에서 낚시하다 신장에 이상이 생김

폐렴에 걸리고 목 수술을 받고 아프리카에 사냥 갔다가 아메바 이질에 걸림

낚시에 나가 상어를 쏘려다가 실수로 자기 다리를 쏨

2차 세계대전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뇌진탕을 일으킴

땡볕 아래 바다낚시를 하다 피부암에 걸리고 배에서 넘어져 네 번째 뇌진탕을 입음

아프리카에서 두 번이나 비행기가 추락해 척추와 두개골이 골절되고 다섯 번째 뇌진탕을 입고 괄약근이 마비되고 화상을 입고 신장과 비장이 파열됨 – 같은 해 노벨문학상 수상

그 밖에 간염, 동맥경화, 당뇨병으로 평생 고생함     


임팩트(?) 있는 사건만 골라 요약한 게 이 정도다. 아마 책에 실린 내용도 실제 있었던 일을 간추린 것일 텐데, 그렇다면 헤밍웨이는 거의 불사조 급이다.

      

위험한 짓만 골라 했던 헤밍웨이의 이런 이상한 행동을 보고 나는 워낙 남성스러움, 강인함, 용기와 의지 등을 중요시했던 사람이니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곳을 일부러 찾아다닌 게 아닐지 생각했다. 분명 그런 측면도 있었을 테지만 이어지는 해설은 좀 다른 얘기였다.

     

헤밍웨이는 평생 죽기를 바랐지만 자살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어 대신 사고 위험이 큰 전장, 바다, 사냥터 같은 위험한 장소를 찾아다녔으나, 다치고 병들 뿐 죽진 못했다는 생각에 실망하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한 것이 죽음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그 대상을 손에 넣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난 왜 애초에 헤밍웨이가 죽기를 바랐는지를 모르겠다. 그의 가족 중에 아버지를 포함해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이 많다고, 가족력이 있다는데 단지 그것 때문일까. 그렇게 죽고 싶어 했던 사람이 <노인과 바다>처럼 인간의 꺾이지 않는 의지를 현현히 묘사하는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죽고 싶어 하는 줄 미처 모르고, 내면에서 분출되는 욕망 위에서 살아남는 욕구라고 오해해 위험천만한 곳을 쏘다닌 게 아닐까. 그러다가 사실은 자신이 진실로 원한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걸 깨닫고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역시 책에서 설명된 현실적인 요인, 즉 FBI의 감시와 정신병원의 전기치료 때문이었다.      

헤밍웨이는 예순 살을 넘겨 우울증과 정신 이상 증세로 인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FBI가 계속 자신을 감시한다고 호소해 과대망상증 환자로 오해받는다. 이에 전기 충격 치료까지 받는 신세가 되고 수십 번이나 이어진 전기치료 때문에 기억력과 인지능력이 심각하게 감퇴한다. 더 이상 글을 쓸 수조차 없어진 헤밍웨이는 폐인이 되었고 퇴원 후 어느 날 집에서 엽총으로 자기 자신을 쏜다.

     

그런데 과대망상인 줄 알았던 FBI의 감시는 사실 진짜였다. 헤밍웨이가 죽은 지 한참이 지나 공개된 기밀문서에 정말로 그가 감시 대상으로 올라 있었던 것이다.

      

FBI가 헤밍웨이를 감시한 이유는 그가 과거 스페인 내전 때 파시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산당과 같은 편에 섰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헤밍웨이는 공산당을 싫어했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에드거 후버(FBI 국장)를 신랄하게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교묘한 괴롭힘은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과거 독재정권 시절 우리나라의 안기부를 떠올리게 해 혐오감이 들었다. 헤밍웨이는 아무도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고 정신병자로만 치부하는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까. 책에 쓰인 표현대로, 꼭 총으로 쏴야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다.

     

헤밍웨이가 자살한 진짜 원인은 아무도 모르기에 위에 언급한 요인들은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가 끝내 ‘패배하지 않았다’라는 해석을 믿고 싶다.

     

<노인과 바다>의 명문장인 ‘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순 없다’를 떠올리면, 헤밍웨이는 비록 파멸했으나 죽음에 패배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전쟁통과 사냥터를 쫓아다니며 증명한 패기와 대담함과 긍지를 생각하면, 병에 무릎 꿇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마저도 그와 어울리는 선택으로 보인다.

     

헤밍웨이가 결코 패배하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헤밍웨이 × 백민석> 책의 마지막 문장이 그 사실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헤밍웨이의 죽음이 어땠든 문화적 의미에서 그의 문학은 파멸되지도 패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풍부해지고 있다.

     

헤밍웨이는 결국 성격에 결함이 많은 한 인간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작가 본인조차 넘어서는 위대함으로 남아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헤밍웨이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노인과 바다>를 정독하고 싶다. 노인이 물고기에게 건네는 말과 바다의 거친 숨소리만이 대부분의 분량을 채운다는 그 소설을 완역본으로 읽어야 겠다. 그렇게 헤밍웨이 문체의 정수, 휴머니즘의 정수에 흠뻑 젖어 문학이 가져다주는 감동을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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