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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02. 2023

포스터와 브로마이드

3화

어느 평화로운 주말 밤이었다. 남편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여보, 어떡하지? 큰일났어.”

 느긋한 성품의 남편이 이렇게 얘기하는 건 드문 일이라서 나는 조금 긴장하고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새로 산 플스 게임이 너무 재밌어.”

“....”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게임이었다. 줄곧 온라인 게임만 하던 그에게 몇 년 전 생일선물로 플레이스테이션4를 사주었더니, 그 후 대부분의 여가를 플스로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시작했다고 하는 갓 오브 워라는 게임에 대한 남편의 찬사(스토리가 너무 재밌어서 완전히 빠져들어. 그래픽도 너무 좋아서 거의 영화 수준이라니까?)를 한참 들어주고는, 나도 말을 꺼냈다.

“근데 여보 있잖아, 난 1일1영웅 해야 돼.”

“영웅? 그게 뭔데?”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엔시티127의 노래였다.

“유튜브에서 뮤비를 봤는데 댓글에 누가 적어놓은 거야. ‘솔직히 1일1영웅 해야 된다’고. 그 말에 엄청 감동 받았거든.”

 나는 실제로 그분의 말을 실천 중이었다. 하루는 음악방송 무대를 보고 하루는 직캠을 보고 또 하루는 멤버별 직캠을 보는 식이었다.

“그래? 그럼 난 1일1퀘스트 해야겠다. 아직 엔딩 볼려면 멀어서 부지런히 해야 해. 할 게임은 너무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걱정이야.”

“맞아, 여보. 나도 아직 봐야 할 컨텐츠가 너무 많거든. 그러니까 우린 서로 분발해야 해. 잠을 줄여서라도 노력해보자.”

“그래그래!”

 우리는 각자 취미에 대해서는 진심이다. 서로를 힘껏 응원해주고는 자기만의 시간에 빠져들었다. 아직 엄마 아빠의 사생활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 딸아이는 고맙게도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의무를 다하던 중 9월이 되었고, 내가 팬이 된 후 처음으로 엔시티127의 새 앨범이 나왔다. 긴 공백기로 인해 기대감이 너무 컸던 나는 알라딘에 예약판매가 뜨자마자 결제를 한 것으로 모자라 삼산 교보문고에 일명 오프깡이라는 것을 하러 갔다. 물론 남편과 아이도 함께였다.


 지하 1층 음반매장에 도착해보니 벌써 꽤 많은 젊은 여성들이 판매대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음반장 상단에는 두 가지 버전의 커다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여보, 이것 봐. 엔시티가 이렇게 인기가 많다니까. 여기 전부 걔네 앨범 사러 온 사람들이잖아.”

“우와. 정말 그렇네. 이렇게 팬이 많은 줄 몰랐네.”

 나는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했다.


 매장에서는 따로 테이블까지 마련해 팬들끼리 서로 포카(포토카드. 멤버들의 얼굴이 신용카드 크기의 종이에 인쇄되어 있는 것)를 교환할 수 있도록 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작부터 앨범은 사도 거기 들어있는 포카는 모으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기에 그냥 지나쳤다. 내가 엔시티의 팬인 건 노래와 퍼포먼스가 좋아서이지 잘생겨서가 아니지 않은가. (‘잘생겨서 좋다’와 ‘잘생겨서 나쁠 건 없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나는 수많은 학생과 아가씨 사이로 유모차를 비집고 들어가 버전별로 앨범을 하나씩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젊은 남자 계산원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팬들이 그렇게 극성이었나? 궁금해하고 있는데 그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엽서는 누구로 드릴까요?”

엽서? 웬 엽서? 나는 당황했다.

“그게 뭐예요?”

 멍청하게 묻는 나를 보고 계산원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음반 사시면 엽서 두 장 드려요. 멤버 누구로 드릴까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포카보다 훨씬 큰 크기의 독사진이 가득 꽂혀있고 군데군데 띠지로 멤버들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아, 저게 엽서구나. 근데 누구를 골라야 하지?

 갑작스럽게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내 표정이 다시 멍청해졌는지, 계산원의 얼굴이 조금 짜증스럽게 바뀌었다. 그걸 보고 소심해진 나는 가장 먼저 떠오른 멤버들의 이름을 말했다.

“해, 해찬이랑 마크요.”

 계산원은 금방 그 둘의 엽서를 찾아 영수증과 함께 건네주었다. 남자가 남자 아이돌의 이름과 얼굴을 꿰도록 만들다니. 돈 버는 일은 역시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새 앨범을 손에 넣고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돌아서려는 찰나, 음반장 위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순간 다시 고민에 빠졌다. 저 포스터를 받아, 말아. 받자니 주책맞고 말자니 좀 아쉽다. 한가지 컨셉이 매우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몇 초간 갈등하던 나는 결국 쭈뼛거리며 다시 계산대로 갔다.


“저기요, 포스터는 어떻게 받을 수 있어요?”

“저기 있는 상자에서 골라서 가져가시면 돼요.”

 나는 귀족적인 컨셉의 포스터를 하나 뽑아서 쇼핑백에 넣었다. 그래, 안 쓰더라도 일단은 얻고 보는 거다.


집에 가서 앨범을 개봉해보니, 예전에 당근에서 샀던 중고 앨범에서는 찾을 수 없던 온갖 구성품들이 쏟아졌다. 포카, 접지포스터, 스티커 등이었다. 그 중 포카는 얼른 사진을 찍어서 당근마켓에 올렸다. 잘 나온 포카는 한 장당 오천 원도 받을 수 있다.


 매장에서 얹어준 엽서는 포카와 달리 수요가 많지 않은 품목이다. 그렇다고 버리기엔 아까워 용도가 없을까 고심하다, 책갈피로 쓰기로 했다. 보통의 책갈피는 크기가 작아서 덜렁거리는 나는 툭하면 잃어버리기 때문에, 이렇게 큰 것을 사용하면 잃어버릴 염려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커다란 포스터는 일단은 둘둘 말려져 있는 채로 서랍장 한구석에 밀어놓았다. 그리고 신나게 앨범 속지를 구경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자꾸 그쪽으로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속지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지만 곁눈질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서랍을 열어 다시 그것을 손에 들었다.


 펼쳐보니 붉은색 배경 앞에 일렬로 서서 포즈를 취한 아홉 명의 멤버들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손에 들고 잠시 추억에 잠겼다.


 초등학교 저학년, 즉 요즘 말로 잼민이었던 시절, 나는 모종의 경로를 통해 귀한 HOT와 젝스키스의 새 브로마이드(그때는 포스터가 아니라 브로마이드라고 했다)를 구했었다. 너무나 기뻤던 나는 당장에 방 한쪽 벽에다가 테이프로 두 장을 나란히 붙였다. 두 팀 다 아주 멋졌다.


 그날 저녁, 외출하셨던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엄마와 아빠는 내 방으로 들어오다가 한쪽 벽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브로마이드를 발견했다. 엄마가 득달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얘가! 정신이 있니 없니! 벌써 이런 데 빠져가지고선!”


 엄마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내가 정성들여 붙여놓은 브로마이드를 마구 떼어버리셨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워낙 엄격한 성격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도 못하게 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십 대들의 우상 다섯 명과 여섯 개의 수정은 나에게 작별을 고했다.


 나는 속상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저녁 내내 혼자 훌쩍훌쩍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퉁퉁 부은 눈을 감은 채 자고 있는데, 조용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였다.


 실눈을 뜨고 아빠가 뭘 하는지 보았더니, 아까 엄마가 떼어내 버린 브로마이드를 다시 벽에 붙이고 계신 것 아닌가. 그때 거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왜 다시 붙이고 있어요! 애 공부에 집중도 못하게.”

 아빠는 무심한 듯 한마디로 대답했다.

“우상이잖아.”

 그때 나는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다. 엄마는 몰라도 아빠는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구나. 고마움이 가슴 속에 뭉클하게 피어올랐다. 아빠 덕분에 두 브로마이드는 내 방에서 수명을 다할 수 있었다.


 엔시티의 포스터를 손에 쥐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왠지 이걸 우리 집에 꼭 붙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이제 어른이 되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대문짝만하게 포스터를 붙였다.


 남편이 방에서 나와 그걸 보더니 한마디 했다.

“우와! 저거 좀 멋지네.”

내가 봐도 정말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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