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온 Mar 02. 2023

당근마켓과 중고앨범

2화

팬이 된 후 나의 첫 행보는 앨범을 사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입덕 초기여서, 요즘 같은 음원 시대에 새 음반을 사는 것이 아까웠다. 멜론에 매달 꼬박꼬박 사용료를 내는 덕에 언제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이미 개봉된 중고 앨범이었다.


 당근마켓에 검색을 해보니 역시 개봉 앨범들이 싼값에 아주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같은 RESONANCE라는 제목인데 Part1과 Part2가 따로 있었다. 두 앨범은 디자인이 완전히 달랐다. 토익도 아니고 이건 뭐지. 검색을 해보니 1은 원래의 앨범이고 2는 리패키지였다. 아, 리패키지까지는 나도 안다. 그건 옛날에도 있었던 개념이거든.


 그런데 웬걸. 각 파트 안에 버전이 또 있었다. Part1은 Past와 Future 버전, Part2는 Departure와 Arrival 버전으로 각각 나뉘어 있었는데, 네 가지 다 디자인이 달랐다. Past는 파란색, Future는 갈색, Departure는 흰색, Arrival은 검정색. 나는 혼란에 빠졌다.


 다시 검색을 해보았지만 각 버전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리패키지는 원 앨범에 없던 신곡이 추가되었다는 차이라도 있는데 이 버전들은 수록곡까지 똑같았다. 그런데 나 말고는 아무도 그 점을 궁금해하지 않는지, 아무리 찾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판매자에게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당근에서 적당한 판매자를 골라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엔시티 레조넌스 파트2 사고 싶은데요.”

“네! ㅎㅎ 어떤 버전이요?”

“어...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두 가지 차이가 뭐예요?”

“하나는 디파쳐고 하나는 어라이벌 버전이에요!”

“그건 저도 아는데요... 그러니까 그 두 개가 차이가 뭐예요? 디자인만 다른 거예요?”

“네! 컨셉이랑 디자인이 달라요ㅋ 사진들도 다 달라용 ㅎㅎ”


 나중에 알았지만 요즘 아이돌 앨범은 컨셉이나 모양 등을 달리해서 최소 2종 이상의 버전으로 출시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난 실물 음반을 사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고민 끝에 둘 중 조금 더 밝고 명랑한 컨셉의 디파쳐 버전을 사기로 결정하고 판매자와 약속을 잡았다. 그는 평일에는 학원에 가야 해서 주말에만 시간이 된다는 걸 보아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같았다.


 토요일에 나는 신나게 차를 몰아 약속 장소인 옥동 주민센터로 향했다. 혹시나 해서 들어가 봤지만 역시나 주민센터 주차장은 꽉 차 있었고 차를 돌려서 나올 공간조차 없었다. 힘겹게 후진을 해서 빠져나온 나는 주차할 곳을 찾아 좁고 복잡한 골목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판매자에게는 좀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십 분 이상을 헤맨 끝에 도저히 자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마지막 보루로 남부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도 평소 자리 없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주민센터를 제외하면 가장 가까운 공공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날 딱 한 자리가 비어있는 게 아닌가.


 마치 나를 도와주는 듯한 상황에 고무된 나는 신이 나서 주차를 하고 내렸다. 그리고 후문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거기 차 대고 나가면 안 돼요!”

 헉. 관리인 아저씨였다. 분명 아까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나신 거지. 놀란 나에게 다가온 아저씨는 다시 한번 야단을 쳤다.

“이용객들도 자리가 없어 난리인데 여기 대고 나가면 안 되죠. 빨리 빼세요.”

“네...”

 나는 쭈글쭈글해져서 얼른 다시 차에 올라탔다.


결국 나는 차를 세우지 않고 주민센터 앞을 그냥 지나갈 테니 창문 너머로 물건을 받겠다고 판매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흔쾌히 알겠다는 답장이 왔다.


 다시 돌고 돌아 직접 만난 판매자는 역시나 앳된 모습이었다. 독서실에 가는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자기 몸만 한 크기의 백팩을 맨 그 학생은 조수석 창문 너머로 종이봉투를 수줍게 내밀었다. 나는 얼른 삼천 원을 건네주고 종이봉투를 소중하게 내려놓았다. 고맙다고 인사한 후 걸어가는 학생의 뒷모습을 보니, 왠지 쟤 내일 학교 가서 웬 아줌마 한 명이 와서 앨범을 사 갔다며 신기하다고 호들갑을 떨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차는 드디어 골목길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들었고, 나는 얼른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신호가 걸리자마자 봉투에 손을 넣어 물건을 꺼냈다. 잔뜩 기대하면서 표지를 본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분명 난 흰 표지인 디파쳐 버전을 산다고 했는데 손에 들린 건 검정색의 어라이벌이었던 것이다. 나는 바로 학생 판매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기요~ 물건을 잘못 주신 것 같아요. 저는 하얀색 앨범을 산다고 했는데요.”

“디파쳐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때 어라이벌 사신다고 하셨는데요?”

거래가 끝나서인가. 갑자기 말투가 어른스러워졌다.

“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나는 급히 손가락을 놀려 채팅방 화면을 올려보았다. 헐. 학생의 말이 맞았다. 분명 내가 어라이벌을 사겠다고 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찾아봐 놓고 마지막 순간에 버전을 헷갈린 모양이었다. 평소 워낙 헐렁한 나인데 이번에도 실수를 해버렸다. 아이고.


 문득 내가 단순히 실수로 잘못 말했다는 걸 알면 판매자가 그냥 바꾸어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 입장에서는 다시 물건을 챙겨 약속을 또 잡아서 나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겠지만, 사정을 감안해주지 않을까. 그래도 내 쪽에서 먼저 말하기는 미안하니까 일단은 내 실수니 이걸로 한다고 말해보자.


“ㅠㅠ분명 디파쳐라고 얘기한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실수였네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이거 할게요ㅠㅠ.”

 평소에 잘 넣지 않던 눈물 이모티콘도 잔뜩 넣고 최대한 안쓰럽게 보이려고 노력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공업탑에 다 왔을 때쯤 답장이 왔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빨간 불이 되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했는데, 학생의 대답은 이러했다.

“네 ~”


 역시 기대하는 게 아니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검은색 버전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원했던 건 아니지만 찬찬히 앨범을 살펴보기로 하고 소파에 앉았다. 최신 아이돌 앨범을 구경하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신기했다. 앨범이 거의 책 한 권 수준으로 두꺼운데 그 대부분이 멤버들의 화보라서 놀랐다.


 이렇게 화보가 잔뜩 들어 있는 게 요즘 팬들의 취향인가, 하고 한 장 한 장 구경해보았는데, 검정과 빨강의 대비가 강렬했고 꽤 클래시컬한 분위기로 연출되어 있었다. 엇, 이거 내 취향이잖아.


 그렇게 잘못 산 앨범은 처음보다 훨씬 좋은 이미지로 내 책장에 자리 잡게 되었다. 디파쳐 버전도 나중에 다시 구해서 나란히 꽂아주었더니 꽤 보기가 좋았더라.


왼쪽이 파트 원, 오른쪽이 파트 투. 이렇게 차이가 확연하건만 나는 왜 헷갈린 것인가..


이전 01화 그 선배가 러블리즈 팬클럽이라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