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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y 17. 2023

선생님, 이거 있잖아요, 이 취소하는 거요.

제목은 내가 레슨을 받다가 악보를 가리키며 선생님께 던진 질문의 일부다. 난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이거 있잖아요, 이 취소하는 거요. 이건 이 음표에 적용되는 거 맞아요?”     

과연 내가 가리켰던 표시는 뭘까? 


바로  요것이다. ‘제자리표’라고 한다. 

    

초등학생 때 학원에서 올림표(#), 내림표(♭)와 더불어 제자리표라는 이름을 분명히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까맣게 잊어버린 거였다. 마음은 급하고 빨리 물어보고는 싶고, 올림표나 내림표가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한다는 효력이 있다는 건 기억하고 있으니, ‘취소하는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표현이 나온 것이다.  

    

선생님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이제까지 레슨하면서 제자리표를 취소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분은 처음 봐요.”

아마 회사에서 결재취소도 하고 주문취소도 하고 이리저리 많이 쓰는 단어가 ‘취소’이기에 그랬나 보다.      




피아노를 배울 때 나 같은 초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올림표와 내림표의 존재다. 특히 그것들의 개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쳐보기도 전에 겁부터 먹는다.     


몇 개월 전 나는 염원하던 곡인 보아의 <메리 크리> 악보를 선생님 앞에 턱 내놓았다. 

“선생님, 저 이거 꼭 완성하고 싶어요.”     


<메리 크리>는 높은음자리표 옆에 내림표가 다섯 개나 붙어 있었다. (수정-확인결과 여섯 개였습니다 ㅠ) (내가 별 어려움 없이 초견으로 칠 수 있는 조표의 개수는 내림표 네 개까지다. 다섯 개부터는 급격하게 난이도가 높아진다.)     


<메리크리> 다음으로 내가 도전한 곡은 장나라의 <고백>이었다. 이 곡의 악보는 올림표가 무려 여섯 개(!) 붙는다. ‘파도솔레라미시’순인데, 이 중‘시’만 빼고 모두 반음을 올려서 쳐야 하는 것이다. 악! 너무 헷갈린다.     

그나마 내림표가 많이 붙은 곡은 연습해본 경험이 꽤 있어서 조금이라도 수월한데 올림표는 더듬더듬, 갈팡질팡 그 자체다. 이 얘길 선생님께 했더니, 누구에게나 더 편한 조(調)가 있다고 하시며 역시 연습량의 차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올림표든 내림표든 얘네만 잔뜩 붙어 있으면 그래도 괜찮다. 문제는 여기에 앞에서 언급한 그 제자리표까지 더해졌을 때다.      


반음 올리거나 내리는 건 어렵긴 하지만 결국 조표가 바뀌기 전까지는 유지되므로, 연습을 많이 해서 해당 음에 대한 건반을 외워두면 생각보다 칠 만하다. 그런데 마디의 중간에 뜬금없이 제자리표가 붙어 있으면 다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딱 그 음만 반음 올리지 않거나 내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지금 연습 중인 모차르트 소나타 6번 1악장의 두 번째 주제다. 겉으로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왜 그런가 하면,     




우선 저 m.s. 로 표기된 부분, 즉 왼손과 오른손을 교체해서 별개의 멜로디를 진행하는 부분이 미친 듯이 헷갈린다. 두 번째, 그 와중에 오른손이 조표에 맞게 제대로 반음을 올려서 치도록 신경 써야 한다. 세 번째, 이미 골치가 아픈데 중간중간 붙은 제자리표에 따라 그 음만 올리지 않도록 주의하기까지 해야 한다.     


이쯤 되면 나는 머리가 팽글팽글 돈다.     


세상의 모든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다. 그분들은 어떻게 해서 극악의 난이도인 악보를 그토록 완벽하게 쳐내는 걸까? 신기하고 부럽고 대단할 따름이다. 아마 타고난 재능에다가 어마무시한 연습량이 더해진 덕분이겠지. 


저번 주 레슨은 선생님 사정으로 쉬었으니 이번 주는 레슨을 가야 하는데, 연습을 하나도 안 했다. 부러워만 하지 말고 나도 얼른 연습이나 해야겠다.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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