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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Jul 10. 2023

내게 가장 사랑스러운 소설, <작은 아씨들>

① 연한 초록 책과 분홍 상자

 이 글을 포함한 3개의 글은 소설 <작은 아씨들>에 대한 감상문입니다. 1부에는 소설 1부를 중심으로 책에 얽힌 저의 개인적인 추억담을, 2부는 소설 2부에 관해 주로 다루며 자매들의 성격에 관한 이야기를, 3부에는 오늘날 작품이 갖는 의미와 한계에 대해 써보았어요.

① 연한 초록 책과 분홍 상자
② 현실과 동화 사이에 선 자매들
③ <작은 아씨들>, 팬 혹은 안티     

   

 열두 살이나 열세 살 정도였을 때다.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또래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특별히 소중한 물건 몇 가지를 가지게 되었다. 나머지는 잊어버렸지만 확실하게 기억나는 두 가지가 있으니, 만화책 한 권과 소설책 한 권이다. 그중 소설이 바로 이번에 3부에 걸쳐 정성스러운 감상문을 쓰게 된 <작은 아씨들>이다.    

 

 처음 알게 된 후부터 나는 줄곧 이 책을 사랑해왔다. 소설을 읽으며 웃었고, 울었고, 부러워했고, 공감했고, 즐거워했다. 청소년기에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이 책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그 속의 가르침은 그 어떤 권위보다도 엄중했다. 소설 속에는 사랑, 성실, 정직, 지혜, 희생 등 세상의 모든 고귀한 가치가 다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교훈적이었던 몇몇 문장은 삶의 지침으로 삼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이다.

‘내가 착한 아이로 자라면 언젠가는 음악도 내 것이 될 거야. - 베스’


이 문장에 몹시 감명받아, 틈만 나면 마음속에 되새기며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썼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다. 베스처럼 좋은 사람이 되어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이루는 상상을 하면, 가슴이 벅찬 희망으로 부풀어오르곤 했다.     



<작은 아씨들>은 다 큰 어른이자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의 내게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미덕을 일깨워준다. 이 글을 쓰려고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정독했더니, 어렸을 때는 잘 이해하지 못한 새로운 메시지가 보였다. 바로 공동체적인 삶의 가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이다.     


 마치 가는 가족과 친구와 기쁨도 슬픔도 공유하며 진심 어린 애정으로 서로를 챙겨주고 보살핀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아는 덕분이다. 반면 나는 그동안 맞벌이를 한다는 이유로 아이와 자주 놀아주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하기만 했다. 퇴근하면 힘들고 피곤하다며 TV 앞에 아이를 방치했다. 같이 놀자는 아이에게 나중에, 내일, 이라는 변명만 반복했다.     


 베스는 인형을 아주 좋아하지만 언니들에게 물려받은 낡은 인형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그러나 베스는 그 인형들에게 깨끗한 옷을 만들어주고, 해진 부분을 고쳐주며 무한한 애정을 쏟는다. 가족들 역시 그 인형들을 진짜 사람처럼 친절하게 대해주며 베스를 배려한다.     


 우리 아이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새 장난감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이런 베스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아이는 낡고 오래된 놀잇감이라도 엄마 아빠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갈구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지금까지 교훈적인 부분을 주로 이야기헀지만 <작은 아씨들>은 설교 가득한 따분한 책이 아니다. 그 자체로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사건이나 전개 없이 인물들의 소소한 일상을 묘사했을 뿐인데도 신기할 정도로 재미있고, 에피소드가 하나하나 주옥같다. 너무나 유명한 일화들이라 굳이 소개할 필요도 없겠으나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음 이야기들이다.     


네 자매가 직접 연기하고 무대를 꾸민 크리스마스 연극
로렌스 할아버지에게 직접 만든 슬리퍼를 선물하고 피아노를 받은 베스
일 안 하고 놀기만 하면 정말 좋을지 알기 위해 벌인 실험
로리의 영국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던 캠프          


어린 시절 나는 이렇게 사랑과 우정이 넘치는 에피소드들을 읽으며 분명 행복한 기운을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어두운 현실과 비교하며 울적해지기도 했다. 우리 집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밤 고민했다. 왜 우리 집은 소설 속의 마치 가처럼 화목하지 못할까. 왜 부모님은 툭하면 다투고 나와 동생도 매일 싸우게 될까. 그리고 왜 나는 작은 잘못에도 언제나 무섭게 혼이 나야 할까. 어린 내게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 집이 마치 가처럼 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나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 책을 가장 소중한 보물로 삼고 고운 분홍색 종이로 포장한 상자에 담아, 매일 밤 머리맡에 두고 자곤 했다. 다정한 가정을 향한 갈망이 특히 강해지는 날에는 언제고 상자에서 귀중한 책을 꺼내어 마치 가의 화목한 모습을 엿보았다.  

    

 떄로는 그들이 너무 부러워 숨죽여 울기도 했만, 그래도 난 이 소설을 너무 좋아했다. 악한 인물 하나 없이 선량하고 건전한 사람들만 가득 등장하는 이 사랑스러운 작품을. 그래서 자주 상상하곤 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작은 아씨들>을 읽는다면, 조금이라도 더 착하고 순수해지지 않을까?        


    

 위 사진이 초등학생의 내가 보물 상자에 넣어두곤 했던 그 오래된 책이다. 어떻게 이 판본을 갖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번역이 아주 고창연한 말투로 되어 있어서 나 같은 아이가 읽기에 적절한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신기한 옛날 번역 투를 좋아했다.

     

  표지에는 예스러운 문체로 옮겨진 ‘마음 편안할지어다, 사랑스러운 이여! 구름 뒤에는 늘 빛이 있으니...’ 라는 소설 속 한 구절이 적혀있어서, 마음이 무척 힘들 때 되뇌며 위안을 받곤 했다.

     

 나는 이 소중한 책을 예쁘게 꾸미고 싶어 표지를 투명 비닐로 감싸고는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구해다 그 위에 붙였다. 한창 푹 빠져있던 그룹 SES의 멤버 유진이었다. 은은한 파스텔색 책과 함께 아름다운 유진 언니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작은 만족감과 뿌듯함을 느꼈다. (좀더 나이먹고는 부끄러워져서 사진은 떼어냈다)


 시간이 지나며 종이의 질이나 번역 면에서 훨씬 좋은 판본들을 접하게 됐지만, 언제나 가장 아낀 것은 내가 직접 꾸미고 매일 곁에 두고 자던 이 것이었다. 지금도 이 책은 내가 소장한 도서 중 최고最古의 지위를 가지고 책장의 좋은 곳을 자랑스럽게 차지하고 있다.     


(2부 ‘현실과 동화 사이에 선 자매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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