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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y 18. 2019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떠나본 적 있나요?

어쩌다 보니 사중인격



지금 다니는 회사로 이직이 확정되던 날. 내게 선물 같은 2주의 여유가 생겼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기만 했던 혼행에 도전하고 싶었다. 비장한 각오로 이탈리아 여행을 결정했다. 비행기 티켓 값과 이탈리아의 물가를 알아보다가 가방을 통째로 도둑맞았다는 후기를 여러 번 보게 됐다. 겁이 났다. 독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너무 심심해서 술만 마셨다는 후기를 읽었다. 아름답다고 함께 감탄할 대상도, 맛있다고 함께 맞장구쳐 줄 대상도 없으니 뭘 해도 감흥이 없다고 했다. 장거리 여행은 결코 혼자 갈 게 못 된다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그래, 홀로 부산에도 가본 적 없는 내가 유럽은 무슨. 소박하게 국내부터 시작해볼까, 아니면 아시아 지역으로 갈까? 한 없이 부풀었던 혼행의 꿈을 미련 없이 접고 가까운 지역으로 후보를 좁혔다. 장거리는 NO. 낯선 지역도 NO. 같이 갈 대상도 물색했다. 바빠서 휴가를 쓸 수 없는 남편을 제외하고 나니 함께 떠나고 싶은 사람이 단번에 떠올랐다. 엄마였다.



엄마는 친구와 일본 여행을 떠나려고 여권을 만들었지만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장롱 속에 묵혀두는 중이었다. 계획대로라면 그때가 첫 해외여행이 되었을 텐데 이곳저곳 구경하기 좋아하는 엄마가 이제야 처음 해외에 나가보다니. 장거리 비행은 싫다던 엄마의 말을 나는 늘 핑곗거리로 삼으며, 함께 떠나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두세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도 좋은 곳이 많은데 그동안 뭘 하고 살아온 걸까 한심했다. 엄마와 떠날 일정을 맞추고 부랴부랴 비행기 표와 숙소를 검색했다. 번화가에서 가까운 곳으로, 맛집이 즐비한 곳으로, 그맘때쯤 열릴 성대한 축제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그렇게 우리의 목적지를 태국으로 확정했다.



태국의 4월은 더욱 기운이 있는 날씨였지만 다니기에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가 계획한 스케줄에 맞춰 여행해왔던 나였기에 엄마를 리드하며 잘 다닐 수 있을까 잔뜩 긴장했다. 행여나 예약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면 어쩌나, 택시가 엉뚱한 곳에 내려주면 어쩌나. 내색은 안 했지만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경계를 풀지 않았다. 다행히 별 탈 없이 숙소에 도착했고 엄마도 그곳을 퍽 마음에 들어했다. 짐을 풀자마자 엄마에게 단출한 일정표를 건네며 이번 여행의 목적을 이야기했다.



“엄마의 첫 해외여행 테마는 휴양이야. 무조건 1일 1 마사지. 퇴직금도 있으니까 1일 2 마사지도 가능! 잘 먹고 잘 쉬다 가는 거야.”



낯선 곳에 가면 2만 보, 많게는 3만 보씩 걷는 나의 뚜벅이 여행 스타일을 모조리 잊었다. 엄마의 첫 해외여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게 목표였다. 신혼여행 때 남편을 하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바람에 10시간 넘게 곯아떨어지게 만든 전적이 있으므로 숙소 근처 위주로 여유롭게 일정을 짰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쪽은 엄마가 아니라 나였다. 온종일 걸어도, 축제 내내 뛰어놀아도 엄마는 피곤한 기색 하나 없었다. 일 년에 한 번, 태국에서 열리는 송크란 축제는 물총 싸움으로 유명한데 엄마는 금세 축제 속 무리와 하나가 되었다. 나의 괴물 체력은 엄마가 물려준 것임에 틀림없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 우리 모녀는 다리 곳곳에 파스를 붙이고 잠들었다. 아침에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마시지 숍에 들러 몸을 풀었다. 여행지에 오면 골목 구석구석 다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도, 이 가게 저 가게에서 조금씩 맛보기를 좋아하는 것도 전부 엄마를 닮았던 거구나 싶었다. 단둘이 오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것이다. 내년에는 조금 더 먼 곳으로, 조금 더 빡빡한 일정으로 여행을 떠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는 다음 목적지를 떠올려봤다. 단언컨대, 그 여행은 하루 4만 보까지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6년째 글로 먹고사는 카피라이터.

3번째 결혼기념일을 앞둔 아내.

3남매 중 둘째 딸.

7년째 고양이를 모시고 있는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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