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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y 25. 2019

오늘 밤엔
그 포장마차가 좋겠어

어쩌다 보니 사중인격



내 20대의 절반은 술과 함께였다. 이제는 술만 마셨다 하면 바로 곯아떨어질 만큼 알코올 쓰레기가 되었지만 그땐 서너 병도 거뜬했다. 가는 곳마다 선배들에게 예쁨 받았다. "얘가 그렇게 술을 잘 마신대." 이 한 마디면 어느 자리에나 쉽게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런 환경은 내게 '잘 마시는 게 잘 노는 것'이라 착각하게 만들었다. 술 잘 받는 체질도 한몫했다. 낮술이나 폭음을 해도 낯빛이 달라지지 않았다. 적당히 알딸딸한 기분으로 보내는 날들이 많았다.



내게 처음 술맛을 알게 해 준 곳은 동네에 있는 작은 실내 포장마차였다. 20평 남짓한 공간은 한쪽 다리가 흔들거리는 테이블과 플라스틱 의자로 채워져 있었다. 이름부터 특이한 오스떡(오징어, 스파게티, 떡볶이의 줄임말)이 그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였는데 소주와 먹기에 제격이었다. 금세 입소문이 났고 잡지와 신문에도 실렸다. 주당으로 소문난 연예인들이 하나둘 찾아오더니 꽤 이름난 포장마차로 자리 잡았다. 생각날 때마다 쓱 가던 곳이 점점 유명해지자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후에도 부지런히 찾아갔다. 처음 본 사람도 수십 년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히 대해주는 종업원들 덕이었다. 어느 날은 주문한 메뉴보다 서비스로 나온 메뉴가 더 많았다. 그 정도로 풍성한 안주들이면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도 남았다. 아마도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어른들이 왜 오랫동안 술자리를 떠나지 못하는지를. 했던 이야기를 왜 그렇게 하고 또 하는지를.



하지만 술과의 깊은 인연은 생각보다 짧았다. 취업과 독립을 하면서부터였다. 출근해야 할 곳이 생기고, 일찍 일어나야 할 일이 잦아지니 술과 조금 거리를 두게 됐다. 적당히 마시는 법도 자연스레 배웠다. 취기 없이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커피를 마시고도 취한 것처럼 놀 수 있게 되었다. 술은 반드시 좋아하는 사람 하고만 마시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일까.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나는 애주가라는 타이틀에서 점점 멀어졌다. 어느 정도 마실 줄 안다는 인상 정도면 충분했다. 이따금 자주 가던 그 포장마차가 생각나긴 했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포장마차를 우연히 마주쳤을 땐 무척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허름했던 외관은 새로 페인트칠을 했는지 말끔해졌고, 플라스틱 간판도 휘황찬란한 전자식으로 바뀌었다. 실내 흡연이 금지되어서인지 입구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도 보였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전화 한 통에 달려와 술 한 잔 기울이곤 했던 친구가 생각났다. 동네 친구 중 제일 먼저 엄마가 된 친구였다. 아마 두 아이는 소주잔을 부딪치던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하겠지. 미래의 내 아이도 부디 모르길 바란다. 술에 취해 포장마차 문짝을 흔들어대던 내 모습을.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사소한 일로 울고불고했던 내 모습을.



한때 술과 한 몸이었던 사람으로서 느끼는 바가 있다. 단골 가게 하나쯤 갖고 있으면 일상의 행복 또한 커질 수 있음을. 나의 추억이 곳곳에 묻어나는 곳, 곱씹고 또 곱씹어도 재미있기만 한 서로의 흑역사를 안주 삼는 곳, 2대, 3대째 계속 그 자리에 남아줬으면 하는 곳 말이다. 그런 가게에서는 굳이 주량을 넘지 않아도 기분 좋은 취기를 얻을 수 있다.





6년째 글로 먹고사는 카피라이터.

3번째 결혼기념일을 앞둔 아내.

3남매 중 둘째 딸.

7년째 고양이를 모시고 있는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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