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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Sep 05. 2019

점심은 혼밥합니다

THE BIG ISSUE KOREA 208



상상이나 했을까요?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여름을 이렇게 바쁘게 보내게 될 줄. 진작 알았더라면 예정보다 일찍 휴가 계획을 세웠을 텐데,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일로 전쟁 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주말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신경 쓰다 보면 흘러가는 날짜를 놓쳐버리기 일쑤였지요. 평일의 고비를 몇 번 넘겼을 뿐인데 7월의 절반을 써버렸다니. 귀한 여름날을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홀로 점심을 먹는 것이었어요. 태어나 단 한 번도 혼자 식당에 들어가 본 적 없는 제겐 꽤 신선한 도전이었습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그러려고 노력했어요. 주변 회사들보다 점심시간이 빠른 데다 무려 두 시간이나 주어지니 먼저 그 시간을 잘 써보기로 했습니다.


회사 건물을 빠져나오면 일단 목적지 없이 걷고 싶은 날이 많습니다. 무기한 미뤄둔 진료 과목이 종종 생각나기도 하지요. 그러면 근처에 있는 병원을 찾아봅니다. 지난번 욱신거렸던 허리 치료도 받고, 최근에 쿡쿡 쑤셨던 치과 치료도 받고 나면 내가 나를 잘 돌본 기분이 들어요. 대부분의 병원이 낯선 골목에 위치한 덕분에 걷는 시간도 늘어납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가게를 발견하면 그곳에 들어가 여유롭게 식사를 해요. '빵순이'라는 별명답게 대부분 밀가루 음식인 경우가 많은데, 혼밥을 하면 상대방에게 의사를 물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 가장 좋아요. 아마 병원 핑계가 없었다면 이런 가게도 만나지 못했을 테고, 하루에 2000보도 채우지 못했겠지요.


어제는 남영동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단 한 번도 내린 적 없는 남영역의 풍경은 무척 생소했어요. 세상에, 출구가 하나밖에 없는 지하철역이 있었다니. 30년 넘게 서울에 살고도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네요. 양쪽으로 나뉜 입구에서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펴보다가 평소 좋아하는 샌드위치 가게를 발견했어요. 혼자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꽤 많아 보였습니다. 가게로 향하는 동안, 전공 책을 안고 스쳐 지나가는 여대생들을 보니 잊고 지냈던 어느 날도 생각났어요. 근처에 있는 대학교가 친한 친구의 모교여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다며 같이 툴툴거렸던 브라우니 가게도, 휴학하면 뭘 할 건지 함께 고민에 빠졌던 순두부찌개 가게도 모두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만, 지금은 그때의 우리를 닮은 풋풋한 친구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었지요. 다행이었어요. 남영동의 시간은 평소보다 느릿느릿, 천천히, 제가 음미할 수 있을 만큼 다정하게 흘러하고 있었습니다. 늘 먹던 샌드위치가 그날은 왜 그렇게 맛있었던 건지. '남영동' 하면 이제 샌드위치가 가장 먼저 생각날 것 같아요.





'Kitkat Campaign' <출처: www.adsoftheworld.com>



"Have a break. Have a Kitkat."


오늘도 회사 근처 식당에 앉아 비슷한 모양의 사원증을 목에 걸고, 비슷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이런 날이 한 번, 두 번, 열 번 그렇게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닐까 하고요. 무탈하게 흘러가는 하루가 나쁜 건 아니지만,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조차 바라지 않는 제가 썩 마음에 들진 않네요. 다시 돌아온 여름일지라도, 서른세 살의 여름은 생애 한 번 뿐일 테니까요.


비와 함께 찾아온 무더위. 여름을 사랑하는 저조차 금세 지치게 되지만, 그늘 안에 찾아온 바람을 느낄 때면 '아, 이래서 내가 여름을 사랑했었지' 떠올리게 됩니다. 잊고 지냈던 날들도, 앞으로 꼭 만들어가고 싶은 날들도 저절로 생각나요. 그 순간, 바람은 제 귓가에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나갑니다. 지금은 주변을 잠시 잊어버려도 괜찮다고. 그러면 오늘의 네가 더 선명히 보일 거라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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