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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06. 2019

처음이라는 특권

최선을 다해 못해보겠습니다



약속한 주말이 찾아왔다. 5분 뒤면 집 앞에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고 부랴부랴 나갈 채비를 했다. 어젯밤 내내 신경을 쓴 탓인지 조금 피곤한 상태였다. 이제 와서 취소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누가 본다면 매우 중대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내가 맞닥뜨릴 일은 ‘운전연수'에 불과했다.



어디 보자. 면허를 따고 처음 운전대를 잡은 것이니 자그마치 10년 만. 깜빡이 하나 제대로 켜지 못하는 내게 선생님은 10시간은 무슨, 50시간은 필요할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오늘은 첫날이니 아파트 주변이나 빙빙 돌 줄 알았는데, 나는 금세 도로 위에 무방비 상태로 던져졌다. 아, 이게 얼마 만에 마주한 쫄깃한 느낌인지.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다. 여러 대 먼저 보내주는 게 미덕인 줄로만 알았건만, 주변 차들과 속도를 맞추지 못해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고, 차선 변경하는 데만 여러 번 애를 먹었다. 오로지 선생님이 핸들을 같이 붙들고 있을 때만 안심할 수 있었다.



"근데, 왜 진작 연수 안 받았어요?"

"새로운 걸 배우기가 좀 무서워서요."

"그럼 뭐, 맨날 하던 일만 하나?"

"하던 일만 하면 실수할 일 없잖아요. 당황할 일도 없고."

"에이, 첫 술에 어떻게 배가 부릅니까."



왕십리까지 찍고 돌아오는 길, 약간의 여유가 생겼는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 운전 관련된 이야기였지만, 그동안 내가 꽤나 경직된 생활을 해왔음을 알 수 있는 대화였다. 이렇게 낯선 환경에 나를 던져 놓은 게 얼마만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배우기보단 유지하기를 택하기 바빴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방비 상태가 두려웠고, 이건 내 고질병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어떤 일이든 실수를 경험하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겁을 먹는다는 것. 어리숙한 상태에서 능숙한 상태가 되기까지, 나는 늘 '반드시 필요한 그 시간'을 잘 견디지 못했다. 그렇게 흘려보내고 만 몇몇 어리숙한 일들을 떠올리며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렸다.



2시간 만에 집에 도착하자, 선생님은 직진도 제대로 못하면서 커브 도는 법을 묻는 내게 '빨리 하려고 하지 말고 제발 오늘 할당량이나 잘하라'는 말만 남긴 채 사라졌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도로 위를 달리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어젯밤 나를 붙들고 있던 막막한 느낌은 사라졌다. 오히려 잘하지 못해서 마구 밟아보기도 하고 덜컥 멈춰서 보기도 했던 순간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그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 당분간은 최선을 다해 잘 못해보기로. 처음으로 괴상하지만 마음 편한 다짐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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