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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Dec 30. 2019

돌아가고 싶은 순간

어느 예능 프로그램으로부터



"그때가 좋았지."

어렸을 적,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돌아가고 싶은 '그때'가 있구나. 누군가는 희미한 옛 시절을, 또 누군가는 얼마 지나지 않은 따끈따끈한 날을 그리워했다. 나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떠올리는 순간이 있었다. 가족들과 산책하던 동네 공원이,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운동장이, 밤새 야작을 했던 강의실이 그랬다. 사람, 공기, 분위기 뭐 하나 빠짐없이 완벽해서 좋은 날도 있었고, 힘겹긴 해도 나를 웃게 하는 것들이 곁에 머물러서 좋은 날도 있었다. 이따금 그날들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게 내겐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어느 글쓰기 모임에서였다. 차분한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 큰 변화 없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쓴 글들엔 모두 단단함이 묻어났다. 소신 있고 흔들림 없는 사람 같았는데, 마지막 모임을 앞둘 무렵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누구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어요?'라는 질문에 그녀가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라면은 절대 싫죠. 지금이 좋아요.
영화 한 편 다 찍었는데 처음부터 다시 찍으라면 좋겠어요?
날밤 새고 울고 불고 막 다했는데
또다시 처음부터 찍으라면은 진짜..

_꽃보다 누나 '김희애'



PD의 질문에 손사래를 쳤던 김희애씨처럼,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요. 전 지금이 너무 좋은데요'라고 대답했다. 곧이어 지금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매 순간 행복하다고 할 순 없지만 항상 지금이 가장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나는 그리운 날이 너무 많아 뭘 골라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지금이 좋다는 말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 인생에 만족스러운 지금은 없었던 것도 같았다. 내가 바라는 날은 어느 빛나던 과거 혹은 꿈꾸는 미래에 있었다. 



"지금이 좋아요."

지금도 문득 그녀의 말이 떠오를 때마다 생각한다. 누군가가 그때와 같은 질문을 해온다면 그녀처럼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을까. 그저, 과거를 그리워하느라 미래를 꿈꾸느라 빛나는 지금을 놓쳐버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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