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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y 18. 2024

기대를 걸 만한 관계

3화 : 더는 화를 내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이유


오래 쌓아온 친구 관계든, 직장에서 만난 일적인 관계든 제가 부러워하는 부류는 딱 하나입니다. 어떤 상황을 겪게 되더라도 크게 실망하거나 크게 화를 내지 않는 성향의 사람들이죠. 특히나 회사에서 매번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건 제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어요. 갑작스러운 수정 요청, 수시로 바뀌는 가이드라인, 예의 없는 말투, 이성의 끈을 단단히 붙잡고 있지 않으면 금세 얼굴 붉힐 일이 생기곤 했으니까요. 그런 제 눈에 어느 날 한 선배가 눈에 띄었습니다.


"화 안 나세요? 왜 저러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요."


회의가 끝난 후, 모두가 자리로 돌아갔는데도 저는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 거리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3-4개씩 릴레이 회의를 해야 할 때면, 특히나 몇 시간 동안 갇혀 열띤 토론을 펼쳤음에도 답을 찾지 못한 채 회의가 끝날 때면 그 답답함을 어찌 해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무엇보다 그날의 회의가 유난히 힘들었던 건 협업하는 부서의 태도 때문이었지요. 처음 준 가이드와는 완전히 달라진 내용을 꺼내면서도 조금의 사과도 없이 뻔뻔한 태도를 취하고, 악성 클라이언트에 빙의하여 마치 우리를 하청업체 대하듯 말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요. 며칠간 쌓아온 우리의 고민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자, 분을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 저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선배는 잠시 후 딱 한 마디를 건넸습니다.


"왜 저러나 분석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이해할 수 없거든. 그냥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돼."


그땐 저 말이 왜 이리 서운하고 답답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저런 마음이 들 수 있나 신기할 따름이었지요. '내가 나중에 연차가 더 쌓이면 해야 할 말은 하고야 말겠어!'라며 귀여운 다짐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1년, 2년 더 많은 회의를 경험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겪다 보니 조금씩 제게도 화를 내는 기준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화를 낸다는 건, 이 상황이 내게 불합리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한 편으론 그게 말이 통하는 대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지요. '기대를 걸 만한 관계인가', '바뀔 만한 여지가 있는가'를 한번 떠올려보고 나면 치밀어 오르던 화도 조금씩 가라앉았습니다. 무엇보다 회사생활을 오래 하기 위해선,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선,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 반응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요즘에도 자주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한답니다. 저와 가깝게 지내는 동료들은 제 벌렁거리는 콧구멍만 봐도 '손 카피 또 화났다'라며 놀리기도 해요. 그만큼 억울하고 답답한 순간들은 수시로 찾아오지요. 그럴 때면 저는 그날의 평온했던 선배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일에 쏟을 수 있는 우리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을 텐데, 절대 엉뚱한 곳에 낭비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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