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채 Aug 01. 2022

소울푸드 그리고 돌아온 허기

㉡ㅏ는 힘들 ㄸH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먹는ㄷr...☆

다시 배가 고프다. 그게 기뻐서 다가올 식사시간을 소중하게 기다린다. 갓 지은 밥을 고슬고슬 떠올린다. 이 따끈한 밥 한 입에, 어떤 반찬을 제일 먼저 집어먹을까? 생각하다보면 밥 먹는 시간은 자못 설렌다.


몇 달간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 것은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답게 잘 살려는 의지가 사라지니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최소한의 욕망조차 증발해버린 거였다. 이상할 만큼 배가 고프지 않았다. 책방에서 혼자 밥을 먹는 평일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삶은 계란이나 바나나 같은 걸 입으로 밀어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밥을 먹여야 하는 저녁상은 꼭 차려야만 했다.


내가 배고프지 않고 먹고 싶지 않은데 매일 저녁 한 시간씩 불앞에서 조리를 하고 나면, 아이들에게 쉽게 화가 났다. 두 아이 다 그럭저럭 잘 먹는 편이지만, 첫째는 편식은 없지만 워낙 입이 짧아 얼마 먹질 않고, 둘째는 양은 많지만 편식이 심하다. 기껏 만든 음식을 두고 깨작거리는 아이들을 보면, 나는 그 어린 것들에게 앞뒤 없고 무의미한 하소연을 해대고 말았다.


얘들아, 엄마가 요즘 너무너무 힘들어서 그냥 누워 있고 싶은데
힘들게 만든 음식이야. 제발 골고루 많이 좀 먹어!




이렇게 지쳐버렸다면 어쩔 수 없다. 소울푸드를 먹으러 가야 한다. 스타벅스로 가자. 내 소울푸드는 엄마표 잡채나 오징어 두루치기도, 김치찌개도 아니고 스타벅스 그린티 프라푸치노다. 녹차 가루와 우유, 얼음 등을 갈아놓은 차가운 음료 위에 하얀 휘핑크림을 듬뿍 올린 그린티 프라푸치노* 말이다.

(*지금은 메뉴가 리뉴얼되었는지 이름도 바뀌어 '제주 유기농 말차 프라푸치노'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린티 프라푸치노 그란데 한 잔이요" 하고 주문한다.)


내 소울푸드가 그린티 프라푸치노가 된 건 10년 전 사회생활을 시작하며부터였다. 출판사 신입으로 입사한 나는 초봉으로 연봉 2,500만 원을 받았다. 세금을 떼고 나면 실제 수령액은 월급 185~190만 원 정도였다. 서울 합정동 한복판에서 자취방 월세를 내고 적금을 붓고 생활비를 쓰려면 늘 빠듯한 돈이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되었음에도 100원 200원 따져가며 돈을 아껴 써야 했다.


카페에 가면 보통 아이스 카페라테를 먹었는데, 상대적으로 비싼 프라푸치노 같은 음료가 먹고 싶은 날도 있었다. 생활비를 아끼려면 이런 데서 줄여야지, 하고 보통은 참았다. 저렴한 메뉴 중에 골라 마시기도 했지만 카페 음료 마시는 것 자체를 참고 넘어가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6,000원이 넘는 그린티 프라푸치노는 아끼고 아꼈다 정말 힘든 날에 마셨다. 지친 나를 위한 선물 같은 거였다. 사회에 나와 짊어진 책임의 무게를 느끼며 터덜터덜 스타벅스로 향했다. 혼자 일하고 공부하거나, 둘이나 서넛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르는 사람들 틈에 온전한 내 자리를 차지하고서. 시원하고 달콤한, 그러나 조금 쌉싸름한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먹었다. 오늘만은 아낌없이, 그란데 사이즈로. 듬뿍 올라간 휘핑크림을 떠먹으며. 아무 말없이. 그러고 나면 나는 조금 괜찮아졌다.


여러 날의 그린티 프라푸치노들 ;-)




절망과 우울을 딛고 힘을 내기 위해서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마시는 날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년에 많아야 서너  남짓이었다. 나를 짓누르는 대부분의 사회 경험들은 참고 견디다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일이 되었고, 그렇지 않다면 스타벅스를 찾아갈 힘도 없이 지쳐 나자빠져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마시자.
그리고 조금 괜찮아지자.

2022년 초여름, 무기력증에서 허덕이던 어느 날 스타벅스를 향해 갔다. 역시 그걸 마시니 한결 경쾌해졌다. 그날의 업무를 마치고 기분이 더 나아질 만한 것들을 몇 가지 메모하는 하루였다. 그치만 이번엔 그 힘이 얼마 가지 못했다. 며칠 만에 나는 다시 고꾸라졌다. 역시 밥이 문제다. 허기가 문제다. 배고픔이 돌아오질 않아서 그렇다. 이를테면 건강하게 잘 살아내고 싶은 욕망 같은 것. 그 욕망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곤 7월이 되어 여드레를 꼬박 앓았다. 몸살이 나서 온몸이 찌르는 듯 아파 서거나 앉기조차 힘들었다. 소화능력까지 떨어져서인지 막판엔 급체를 해서 이틀 정도 음식을 먹질 못했다. 열 몇 알의 진통제와 비타민 수액으로 몸은 차츰 이전 상태를 되찾아갔다.


몸과 마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기본 욕망을 잃어버린 채 보낸 몇 날. 그 시간을 꼬박 겪어내고 마침내, 다시 허기가 돌아왔다. 꼬르륵. 배가 고팠다. 하얀 쌀밥을 지어서 따뜻할 때 바삭한 김자반과 함께 먹으면 맛있겠다. 진한 커피도 한잔하고 달콤한 디저트도 하나 곁들여 먹으면 더 좋겠고. 침이 고였다.


다시 허기가 돌아왔고,

나는 맛있게 먹고 즐겁게 살고 싶었다.

다시 잘, 살아내고 싶었다.

그런 날의 내게 그린티 프라푸치노 같은 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이전 12화 나는 매일 죽음을 생각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