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갈까
2023년 3월 20일,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됐다. 병원과 실내약국 등 감염취약 시설 내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하지만 말이다. 2020년 1월 설 연휴, 뉴스에서 처음으로 코로나19 관련 소식을 듣고부터 마스크 생활을 시작했고, 그게 벌써 3년이 넘었다.
의무는 해제되었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특히 나와 남편은 일터를 비롯해 다른 사람과 마주하는 곳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아이들의 경우 놀이터나 공원에서는 마스크를 벗겨주지만 마트나 백화점처럼 사람이 밀집하는 곳에서는 씌워준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물론 쓰는 것보다 안 쓰는 게 편하지만, 안 쓰는 것보다 쓰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19 시절을 보내는 내내 나는 임신부이거나 영유아의 엄마였다.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는데, 내가 더 유난을 떨었던 건 과도한 망상으로 심심할 새가 없는 INFP 특성상과도 연관이 있었던 듯하다.
전염병이란 소재는 역시 계속해서 나를 최악의 상상으로 몰아넣곤 했다. 엄마인 나의 부주의로 코로나에 감염되어 그걸 아이들에게 옮기게 되고,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건상상 어려움을 겪을 만한 후유증을 겪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평생 나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정말 극도로, 과하게, 조심했다.
첫 2년 동안은 미용실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파마나 염색은 상상조차 안 했고 머리카락이 너무 길면 친정엄마가 왔을 때 부엌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라달라고 부탁드렸다. 영화관이나 대형마트, (키즈)카페, 식당에도 물론 가지 않았고,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않았다. 치과 검진이나 종합건강검진도 미뤘고, 아이들 소아과 갈 일이 아니면 병원도 가지 않았다. 국내여행도 전부 포기했다.
부산에 살던 시절이라 휴가철이 되면 친구들이 찾아오려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진짜 미안하지만 아기들이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며 함께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는 것을 비롯해 아예 만남을 거절했고, "너도 이 시국엔 웬만하면 여행하지 말고 조심해"라며 친구의 여행까지 초를 치며 훼방을 놓았다.
코로나 초반엔 책방 문도 거의 열지 않았다. 워낙에 사람이 밀집할 수밖에 없는 작은 공간이었기에 더 조심스러웠다. 구상 중이던 글쓰기 모임도 전부 취소했다. 월세 걱정에 앞은 캄캄했지만, 코로나에 걸려 가서 아이들을 아프게 하는 일만 피하자는 게 내 목표였다.
코로나 시절이 3년 넘는 사이 다행히 그 목표는 지켜내고 있다. 나와 아이들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몇 차례 재유행이 돌면서 육아휴직 이후 회사에 복귀한 남편이 결국 한 번 걸릴 수밖에 없었지만, 가족 내에서 감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격리에 특히 신경썼다.
2년을 넘기며부터야 조금씩 자연으로 캠핑을 다니기 시작하고 점차 활동 반경을 넓혔는데, 반경 몇 킬로미터 안에서만 생활하던 2년 동안도 크게 타인과의 만남을 갈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둘이 생기니, 지인들과 어울리기보다는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자연스럽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기 위해서 하루는 이른 저녁부터 마무리되었고, 일과 후 늦은 시간에 사람들을 만나 거리를 쏘다닐 일도 없었다. 회사생활은 주말엔 멈추지만 육아는 주말에도 계속된다.
그래서 엄마인 사람에게 자유시간이 생기면 오롯이 '혼자' 걷고 읽고 쓰기 위해 충실할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만남'에 대한 결핍에 허덕이기 보다는, 오히려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던 코로나 시절을 보냈던 듯하다.
지난 3년,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안 그래도 내향인인 나는 코로나 이전보다 더 은둔하는 사람이 된 느낌이 들지만, 뭐 어떤가, 그저 내 망상 속 최악의 시나리오와 달리 식구들이 아픔을 겪지 않고 비교적 안전하게 3년을 보냈다는 결말이 소중했다.
그 울타리 안에서 안전했고, 계속해서 생각했고, 써내려갔다.
그게 지금의 내가 되었다면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