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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채 Jul 22. 2022

P와 J 중 일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남편을 위한 변론: 너무나 무거웠을 살림꾼 남편의 짐

아침부터 분노와 우울감이 치솟은 건 쓰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출근하는 길에 분리수거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만큼만 챙겨다 버려야겠다 싶었는데, 베란다에 놓인 쓰레기통과 분리수거 바구니 주변에 초파리가 들끓고 있었다. 몽땅 버리려 쓰레기들과 씨름하다보니 땀이 한 바가지 쏟아졌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한여름의 열기 속, 틀어놓은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황선우, 김하나 진행)에서는 때마침 이런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름의 정자세는 수평 자세다,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름에는 집에서 살림도요, 너무 열심히 꼼꼼히 깨끗이 하려고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대신에 주의하셔야 될 건 뭐냐면, 쓰레기를 빨리 내 버리셔라!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 15화 중


결국 눈물이 펑 터져버렸다. 실컷 울고 나니 시끄러웠던 마음이 조용해졌다. 우울과 무기력, 화가 누적된 요즘. 결국 지난밤 남편에게 “내가 지금 이러저러한 점이 힘드니 분리수거랑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건 여보가 맡아줘요” 하고 말을 꺼냈다. 남편은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진작 말하지”라며 반응했지만, 내 딴에는 힘들어도 남편에게 집안일을 건네지 못한 내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이는 동시에 내 남편을 위한 변론이기도 하다.

   



나와 남편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연애할 때는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다른 점이 더 많다. 그런데 그 다른 점들은 대부분 남편에게 불리하거나 억울하고 나에게 유리하고 즐거운 방향으로 흐르는 일이 많았다. 나는 MBTI 16개 성격유형 중 INFP다. 매사 계획이 없고(어차피 계획한 대로 안 된다고!), 근거 없는 긍정을 하며(좋은 게 좋은 거지), 현실과 좀 동떨어진 몽상(경제 관념 없음)에 자주 빠져 있는 인간이다. 정해진 마감일이 있다면 할 일은 끝까지 미루기 일쑤. 그래도 걱정은 없다.


남편은 나와 반대 성향이다. 나는 MBTI를 너무 좋아해서 몇 번 그 얘기를 꺼내봤지만, 남편은 '그런 걸 안 믿어서 한 번도 안 해봤다'라 답했고 그 말조차 그의 성향을 대변하는 듯했다. 궁금해서 내가 그의 성격을 떠올리며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며 나름 종합분석(?) 해본 결과 아마 ENTJ가 아닐까 싶은데, 거의 정반대에 가까운 지표는 일상에서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


[문제 예시: 우리 집에서 해결할 일이 하나 있다. 일요일까지는 처리해야 한다. 지금은 월요일 아침이다.]
 -> 나(INFP): 일단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행복하게 논다. 토요일에 시작하는데 문제가 생겨서 하루종일 허둥지둥하다가 밤을 새워 끝낸다.
 -> 남편(ENTJ): 일단 월요일 오전에 해치운다. 문제가 생기면 월요일 오후에 해결한다. 끝.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논다.


매사 이런 식이다. 해결할 일이 생기면 내가 시작하기도 전에 남편이 끝을 낸다. 나한테는 물론 너무나 이득이고 나는 점점  룰루랄라 인간이 되어간다. 그러면 그만큼의 노력은 전부 남편이 쏟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집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대소사를 남편이 처리하고 있다. 집안일을 내가 하는 것뿐이지, 경제 상황을 비롯한 집안 운영은 남편이 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경제권을 쥐고 관리하는 게 좋다”는 식의 흔한 얘기를 나도 들어봤지만, 나 같은 인간에게 돈 관리를 맡기면 잘하지도 못하고 스트레스만 받고 쥐약이다.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 전세자금도 남편이 전부 알아보고 대출받았고, 전세보증보험도 알아서 가입했다.


아이들 어린이집도 그렇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낄낄 아이들과 놀고 있는 동안 남편이 어린이집에 대기 신청을 할 수 있는 앱/사이트에 가입하고(나는 아직도 이 플랫폼 이름을 모른다), 마음에 드는 어린이집을 고르고 대기해 다닐 수 있게 해주었고, 매달 보육료 결제도 직접 끝낸다.


다음 집을 구하는 것도 미리 생각하는 게 남편이다. 나는 "아직 이 집 전세가 1년도 더 넘게 남았는데?"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남편의 주장은 이러했다. 다음 집에 살다보면 -> 첫째가 초등학생이 되는 시점이 온다 -> 초등학교에 걸어서 갈 수 있는 집, 초등학생 키우기에 주변 환경이 좋은 집을 찾아야 한다 -> 미리 둘러봐야 한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매번 반복되면서 남편은 우리집 내 많은 미션을 해결한다. 나는 뒤늦게 거들고 걱정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편이다. 큰 돈을 빌리고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을 혼자 하다시피 해왔으니, 남편은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났을까. 때론 불안했겠지, 무서웠겠지.


그런 마음의 빚을 몇 년째 쌓다보니, 나는 '그래 집안일이라도 남편이 손대지 못하게 하자! 오예!' 하고 호기롭게 살림을 몽땅 도맡은 것이었다.



요며칠 해방 모먼트는 드라이브스루로 그린티프라푸치노 사서 나오던 길. 유턴을 너무 멋지게 해내서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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