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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Mar 02. 2022

"성추행 고소하러 왔습니다."

처음으로 경찰서를 가다.

그동안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조언을 구했다.

공유할 내용으로는,


만약 경찰서에서 불편한 일을 겪거나 수사의 의지가 약해 보이거나 하면 경찰서 내의 "청문감사실"에 민원을 넣으라고 했다. 꼭!! 서면으로 넣으라고 조언해 주셨다.


또한,

국선 변호사를 빠르게 선임하도록 해야 하며, 만약 담당 형사가 국선 변호사의 선임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으면 법원의 민원실에 민원을 넣을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이때도 반드시 서면으로 넣으라고...


그리고 필요하다면 한국여성의전화의 상담기록도 발급 가능하다고 알려주셨다.


그리고...참.. 친절하시고 다정하게 나를 걱정해 주시고 신경 써 주셨다...  



고소의 주체로 경찰서를 간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오늘 OO경찰서의 정문을 통과하여, 민원실로 가서 성추행을 신고하러 왔다고 하자 4층의 여성청소년계로 가라고 안내를 해 주셨다.


사실 뉴스나 신문에서 성폭력 사건 이후 경찰이나 형사들의 부적절한 언행 및 태도에 대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좀 긴장을 했다. 그런데 오늘 첫 방문의 결과, 큰 무리는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묻길래...


"성추행 고소하러 왔습니다."


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편에 마련된 자리를 안내해 주셨고 (밀폐된 방 같은 곳이었으면 더 좋았으련만...) 젊은 남자 형사분께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대략 전해 들으시고는 고소장을 건네주셨다.

거기에 나의 신상과 가해자의 신상을 적고, 발생한 일, 고소 이유 등을 적었다.

가해자의 신상은, 이름과 직업밖에 아는 것이 없어서 그것만 적었고, 이후에 가해자의 휴대폰 번호를 나의 드롭박스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회의자료에서 찾아서 기입했다.


그리고는 6하 원칙에 맞춰서 가해가 일어난 상황을 자세히 적었다.

나의 경우는 이러했다.


"2021년 5월 4일 밤 10~10:30 즈음

나의 지인과 지인의 후배와 함께 술을 많이 마셨다.

그 지인의 후배가 나를 집에 데려다준다 했고

OO동 OO식당 주차장에서 대리기사를 기다리며 지인 후배의 차 뒷좌석에서

그가 나를 성추행했다.

나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세게 끌어당겼고 내 오른쪽 어깨를 감쌌으며

가해자의 왼손으로 나의 다리 사이를 V자 모양으로 훑었다.

가해자의 왼손이 나의 왼쪽 다리 안 쪽부터 훑어서 나의 성기에 닿았고 오른쪽 다리 안쪽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술에 많이 취해 있어서 밀어내지는 못하고

결혼하신 분이 이러시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는 기억을 잃었다."


이렇게 상황을 묘사했다. 한국여성의전화나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상담 결과,

최대한 그림 그리듯 묘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여 그렇게 했다.


그리고는 고소 이유로는,

"여행지에서 현지인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 그때는 무섭고 불쾌했으나 다시는 안 볼 사람이니 그냥 덮고 살 수 있었다. 이번 일도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나와 연구 분야가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다시는 만날 일도 없고 그 사람의 이름을 들을 일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판이었다. 한국의 학계는 매우 좁았고 내가 앞으로 학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이름을 마주치지 않고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늦게나마 고소를 하게 되었다.


가해자는 대학에서 강의도 했었고 나중에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 엄벌에 처하기를 바란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내가 가해가 일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누구누구에게 어떤 얘기를 했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카톡 자료와 한국여성의전화 이메일 상담 기록,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통화 녹취록 등 간접 자료들을 최대한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하여 함께 제출을 했다.


고소장을 쓰는 것을 도와준 형사는 나에게 국선 변호사를 선임할 것이냐고 물었고, 신변보호을 신청할 것이냐고 물었고, 앞으로 형사가 담당이 되면 내일이나 모래 중으로 곧 연락이 갈 것이라고 알려줬다.

막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낯설고 긴장되는 장소에서 신뢰가 갈 수 있는 태도로 나를 대해주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까지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경찰서나 법원에 동행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한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간접증거들을 증거로서의 힘이 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 채워진 단추를, 더 진행되기 전에, 다 다시 풀어서 첫 단추부터 다시 채운다는 심정으로 고소를 하고...

봄이 다가오는 햇살을 맞으며 돌아왔다.


앞으로 어떤 귀찮고, 스트레스받고, 모욕적이고, 분노가 치밀 경험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리고 그 과정을 다 거쳐 내고도 난 결과적으로 "패"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싸움이지만 암튼 "시작"을 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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