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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섬세 Nov 17. 2019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고 - 영화 <조커>와 함께

마을의 인기인이자 바람둥이인 체이스 앤드루스가 습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그가 몇 년 간 습지를 몰래 찾아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카야(캐서린 클라크)가 그를 죽인 게 아닌지 의심한다. 일명 마시 걸이라고 불린 그 여자는 학교를 제대로 다닌 적도 없고 마을에서는 멀찌감치 떨어진 채 야생의 습지와 함께 살아왔다. 


체이스 앤드루스를 죽인 사람이 카야라는 명확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여러 상충되는 증언과 증거들이 난무할 뿐이다. 하지만 경찰은 카야를 살인죄로 기소하고, 그녀의 변호를 맡은 톰 밀턴은 재판의 최종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그녀를 마시 걸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많지요. 어떤 이들은 마시 걸은 반인 반늑대라고 속삭였고,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잃어버린 사슬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저 버림받은 아이였습니다. 유기되어 혼자 늪에서 배고픔과 추위와 싸우며 살아남은 어린 소녀를, 우리는 돕지 않았습니다. ... 대신 우리는 그녀에게 늪지 쓰레기라는 딱지를 붙이고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캐서린 클라크를 소외시켰던 건가요, 아니면 우리가 소외시켰기 때문에 그녀가 우리와 달라진 건가요?" - 420, 421쪽



출처 : YES 24

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외로움에 대한 책이라고 말한다. 엄마부터 시작해 형제자매, 무서웠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술주정뱅이 아빠까지도 떠난 이후 혼자 살아왔던 소녀 카야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인간 내면의 외로움에 대해서만 속삭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외로움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것이 카야에게 필연적인 것이었는지 묻고 있다. 이는 책의 마지막 옮긴이의 말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델리아 오언스는 외로움이 인간 본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인간은 외로워서는 안 되는 존재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급을 부당하게 격리하는 차별과 편견이 문제가 된다. 카야의 고립은 사회적 정치적 불의의 소산이다. - 458쪽, 옮긴이의 말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카야는 점핑 아저씨 가족을 제외하고는 마을의 어른들 혹은 공동체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한다. 의무적으로 어른들은 그녀를 학교에 데려갔지만 그것은 단지 법적으로 강제되기 때문이었고, 그녀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여유가 없이 홍합을 캐고 물고기를 훈제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기 바빴다. 체이스 앤드루스가 카야를 농락하고 강간하려고 한 이후에도 카야는 그녀를 구제해줄 어떠한 사회적 장치도 기대할 수 없었다.  


"점핑 아저씨, 세상이 어떤지 아시잖아요. 그 사람들은 체이스 편을 들 거에요. .... 유색인 마을의 처녀가 체이스 앤드루스가 자기를 습격해서 강간하려 했다고 고발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저들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 거에요. 아무것도." - 374쪽



출처 : Amazon.com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카야는 체이스 앤드루스가 자신을 강간하려고 하고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이지만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그녀는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을 살아온 습지에서 도망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와 주위의 어른들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카야가 그동안 배움을 얻고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왔던 것은 습지와 자연이었다. 체이스 앤드루스와의 관계에서 그녀에게 조언을 준 것도 자연이었다. "암컷 반딧불은 허위 신호를 보내 낯선 수컷들을 유혹해 잡아먹는다. 암컷 사마귀는 짝짓기 상대를 잡아먹는다. (카야는) 암컷 곤충들은 연인을 다루는 법을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340쪽)" 결국,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 체이스 앤드루스를 유혹한 후 그를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뜨려 죽였던 것이다. 


영화 <조커>에서도 사회의 버림을 받은 인간이 판단과 삶의 기준으로 무엇을 삼는지에 대한 문제가 잘 드러나 있다. 아서는 부모, 친구, 직장, 연인, 코미디언이라는 꿈 그 모두에서 철저히 배신당하고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그에게는 시에서 보조해주는 상담과 처방약이 중요한데, 시는 복지 예산을 대폭 삭감한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 시 당국, 사람을 단지 웃음거리로 만들어 방송에 내보내는 TV쇼, 삐에로 분장을 하며 열심히 일하는 그를 조롱하고 폭행하는 고담 시의 사람들.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그는 이제 착하게 살고자 하는 사회의 기준을 버리고 정신병이 지배하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아서는 조커라는 괴물로 변한다. 




카야와 조커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사회로부터 고립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 무엇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는지를 본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공통분모가 있다. 카야는 자연을, 조커는 내면의 소리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게 되는데 물론 결과적으로 그들이 저지른 살인이라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책을 읽어보고 영화를 보면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내몰리게 되었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두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초반에 이야기했던 옮긴이의 말로 돌아간다. 그들의 고립은 "사회적 정치적 불의의 소산"이다. 물론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 중에서 타고나게 나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모든 게 사회의 탓이라며 염세주의적인 비판론만 펼치려는 것도 아니다. 두 이야기를 보며 나에게 떠오른 화두는 사회의 역할이었다. 사회는 사람들이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자연 혹은 병이 아니라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울타리를 마련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살 수 있도록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며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사회의 존재 이유이자 사회가 필수적으로 해야만 하는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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