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와 사회>를 읽고
페미니즘은 나에게 큰 숙제 같은 학문이다. 살면서 끊임없이 경험했던 여성으로서의 차별과 공포, 인권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 때문에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이 느껴진다. 하지만 누군가 원색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비난한다면 이에 대해 어떻게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 배움의 깊이가 얕아서도 있지만, 사람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가지는 반감과 시선에 맞설 만큼 용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로나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책과 조금은 더 가까워졌다. 그 와중에 우연히 눈에 띈 이 책은 내가 그동안 고민했던 지점들에 대해 꽤 많은 해답들을 제공해주었다. 15개의 글들이 담겨있고 모든 글들이 내 관심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여러 지식들을 접할 수 있어 즐거웠다. 이번 글은 내가 스스로 고민했던 부분들에 대해 이 책이 제공해준 답을 정리하는 형식으로 진행해보려고 한다.
질문 1. 지금까지 나는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살아오면서 공적이나 제도적 차원에서 대놓고 성차별을 당한 경험은 적다. 생활 속에서 직접적으로, 혹은 공적 자리에서 미묘하게 성차별을 경험한 적은 있지만, 누군가는 내가 예민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 말한다. 점점 더 여성의 상황은 좋아지고 있는데, 내가 너무 민감한 것은 아닐까?
답변 1. 물론 과거에 비해 상황은 많이 변화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이 왜 중요한지, 우리가 왜 불편하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나에게 크게 다가왔던 부분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페미니즘이 단순히 여성 차별 철폐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페미니즘은 이성애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여성, 남성, 성 정체성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14쪽)
다른 하나는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바라봤을 때 젠더에 기반을 둔 위계화는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성들은 저임금 일자리로 몰리며, 심화된 빈곤을 경험하고, 국가의 방기로 여성과 어린이는 성적 폭력의 쉬운 희생자가 된다.”(65쪽) 이 글에서 특히 내 폐부를 찌르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소위 성공한 여성 또한 이러한 체제를 지속하거나 강화하는 데 공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이 필요하다.
내 삶에서 겪는 성차별의 빈도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보편적인 현실 또한 그럴 것이라 여기는 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 개인적인 경험이 진실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는 핑계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기회였다.
질문 2. 성매매가 여성차별에 일조한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인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선택으로 돈을 받고 몸을 파는 행위는 여타 다른 거래와 유사해 보인다. 성매매를 금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2. 먼저, 성매매가 여성의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으로 유지되는 산업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때로 “성매매 문제의 핵심은 성 산업과 성 착취, 성 구매자와 알선자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과 여성들 간의 갈등, 심지어 <성매매 특별법>과 성매매 종사자들 간 갈등으로 여겨진다. 반성매매 운동이 성을 파는 여성들을 억압하는 원인으로 호도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성매매의 근본 원인이자 재생산 구조의 근간인 권력의 카르텔(가부장제, 자본주의, 계급주의, 인종주의, 이성애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교묘하게 감추는 것에 불과하다.(137쪽) 성매매 종사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돈을 벌기 위한 충분한 기회와 수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 혹은 국가나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면 그들의 선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러한 “성노동의 합법화는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전유를 인정하고 젠더 불평등을 유지, 재생산시키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언뜻 여성의 노동권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남성의 자연적인 성적 욕구에 기반한 성매매가 불가피한 것이라는 관점에 동조하는 것이다.”(138쪽) (남성들의 성적 욕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해결되어야만 하는, 결코 참을 수 없는 무언가인가?) 게다가 성매매는 “돈과 권력이 있는 자에게 ‘살 권리’를 승인해준다. 성매매는 단순히 섹슈얼리티의 교환 관계이거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용가치가 아니라”(138쪽) 성차별적 사고방식을 심화시킨다.
질문 3. 대학원에 다녔던 (남자인) 친구는 제도적으로 정해진 여성인력 투입률을 맞추기 위해 프로젝트에 이름만 올린 여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로 인해 다른 남학생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역설하며 이게 바로 역차별의 사례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기에 그런 태도가 이해되어 당시에는 그냥 위로해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해야 할 이야기를 못했다는 찝찝함이 커졌다. 나는 당시 무슨 이야기를 해야만 했을까?
답변 3. 우선 남성들이 왜 역차별을 당한다고 느끼며 여성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는지에 대한 거시적인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남성들의 위기의식은 여성을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예를 들어 가산점 제도의 폐지에 대해 남성들은 군대에서 2년의 시간을 허비하지만 경쟁자인 여성들은 그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다며 이는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에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위기의식이 깔려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편이 모두를 탈락에 대한 공포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278쪽) 이처럼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단순히 여성과 남성 사이의 갈등, 여성 인권의 신장을 위해 남성 인권을 끌어내리는 행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페미니즘은 오히려 남성성이라는 덫에 갇혀 경제적 책임의 굴레에 속박된 남성들에게도 유용하다.
질문의 사례에서도 등장한 “적극적 조치는 때로 능력이 없는 여성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대하고 남성들을 역차별하는 조치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해 온 보이지 않지만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지배적 규칙을 문제시하는 것으로, 노골적인 차별은 감소되었다 할지라도 기존의 조직문화, 제도, 채용, 승진 등 다양한 여성에 대한 장벽을 깨기 위한 것이다.”(328쪽) 훌륭하거나 성공한 여성에 대해 ‘최초’나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부각되는 현재의 사태는 여전히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극적 조치가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해당 제도가 가지는 순기능을 묵살할 수는 없다.
여기서 특히 많이 참고한 글들
1. 여성주의 역사와 젠더 개념의 등장 (이남희)
2. 젠더와 사회구조 (김현미)
3. 성별화된 섹슈얼리티와 여성주의 성정치학 (이나영)
4. 남성성의 위기와 한국의 남성문화 (엄기호)
5. 여성주의, 국가, 성평등 (마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