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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섬세 Jun 26. 2019

애매한 삶을 향한 위로

드라마 <열혈사제>와 창작가무극 <나빌레라>를 보고 

“ 천체가 대우주라면 인간이 사는 세상은 소우주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별이고요. 전 그 별을 매일매일 하나하나씩 탐구하고 있어요 " – 요한, <열혈사제> 中


호흡이 긴 드라마는 쉽게 질려서인지 잘 보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가끔씩 내용이나 배우에 꽂혀 정주행 하는 드라마가 생기곤 하는데, 이제는 종영한 지 꽤 된 <열혈사제>가 그런 경우였다. 통쾌한 액션, 사이다 전개, 개성 강한 캐릭터가 출퇴근길에 부담 없이 웃으며 보기 좋았다. (회사에서 시달리고 나면 그 어떠한 머리 회전도 귀찮아지는데, 그럴 때 딱 알맞은 여가였다.) 특히 김남길이 맡은 김해일 신부가 너무 매력적이었는데, 우리 성당에 저런 신부님이 계시다면 새벽 미사는 물론이고 성당 봉사도 팔 걷고 나설 텐데...... 하는 마음이 절로 들 정도였다. (나는 독실하지 않은 천주교다.)


김남길의 앞광대, 웃을 때 생기는 입동굴, 코믹한 표정과 말투, 유연한 발차기에 생전 좋아하지 않던 수염까지 그의 모든 것과 사랑에 빠지게 되자 결국 나는 김남길 배우에 대한 덕질을 시작했다. 잘생긴 게 최고야, 짜릿해! 하지만 웃기게도, 팬들 사이에서 “생각하는 건 EBS, 생긴 건 에로배우(?), 하는 짓은 투니버스”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매력이 차고 넘치는 그에 대해서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김남길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했던 가슴 떨림이 스트레스로 인한 편두통이 되었고, 설렘으로 인해 잠 못 들던 밤은 나에 대한 고민으로 잠을 설치는 밤으로 바뀌었다. 


출처 : SBS 열혈사제 비하인드 포토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이 단순한 팬의 덕심에서 애정과 질투가 뒤섞인 묘한 감정으로 바뀌게 된 것은 그의 삶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가 했던 노력과 재능, 열정을 쉽게 보는 건 단연코 아니었다. 내가 부러웠던 건 그의 성공이 아니었다.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부터 연기 이외의 다른 길은 생각해본 적 없다고 말할 만큼 뚝심 있게 꿈을 밀고 나갔던 그의 확신, 그리고 문화예술 NGO인 “길스토리”를 통해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수는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그의 삶의 방향성. 이 두 가지가 너무 부러웠다. 애매한 삶을 사느라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지쳐있던 나에게 김남길의 삶은 따라가고 싶으나 너무 멀어 감히 손도 뻗을 수 없어 보였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치며 했던 생각.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을까? 과거에 열심히 공부하고 꿈꿔왔던 미래의 나의 모습은 지금과 같은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걸까? 회사에서 성장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고, 이렇게 남의 똥만 치우며 살게 되는 건 아닐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부질없이 보내다가 나이가 들게 되면 그때의 나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멈춰있는 걸까 숨을 고르고 있는 걸까? 나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위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가왔다. 


나를 위한 생일선물로 좋아하던 웹툰 <나빌레라>의 창작가무극을 예매했는데, 웹툰을 볼 때는 들어오지 않았던 말들이 마음에 박혔다. <나빌레라>는 70대의 늦은 나이에 평생 해보고 싶었던 발레를 시작한 심덕출 할아버지와 발레에 애매한 재능은 있지만 방황하는 청춘 이채록,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채록은 어린 시절부터 아빠의 권유(혹은 강요)로 축구를 포함해 다양한 운동을 시도한다. 하지만 애매한 재능 때문에 미래는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오히려 타인의 원망과 포기가 익숙하다. 심덕출은 가족을 위해 칠십 평생을 생업에 종사하다 늦은 나이에서야 비로소 발레라는 자신의 꿈에 도전한다. 


출처 : 서울예술단 나빌레라


둘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그 두 사람의 삶이 겹쳐 보였다. 젊은 나이에 꿈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고민하고, 돈과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아파하는 채록, 그리고 용기 있게 꿈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와 노쇠한 육체라는 한계에 부딪히는 덕출. 지극히 평범하고도 평범한 사람들의 똑같은 방황과 똑같은 후회를 바라보면서 나의 고민을 다른 사람들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쩐지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내가 꿈을 너무 늦게 찾더라도, 그리고 꿈을 향해 나아갈 때 그 끝이 어딘지 모르고 비록 실패할지라도, 계속 앞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채록과 덕출처럼 나도 나의 평범한 삶을 조금은 더 포근하게 대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사회적인 영향력과 남들이 인정하는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만 바라보면서 내 평범하고 소중한 삶을 별로라고 치부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빌레라>에서 심덕출의 아내는 할아버지가 지금 별처럼 빛나고 있다고 말한다. 내 삶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거나 남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과거의 내가 상상하던 모습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도 하나의 빛나는 별이리라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나의 이 평범하고도 애매한 삶을 온전히 사랑하기에는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그래도 이제는 적어도 밤잠은 덜 설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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