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고 (※스포일러 주의※)
장난감 칼을 휘두르고 비비탄 총을 쏘면서 형형색색의 젤리를 화려하게 터뜨린다. 하얀 보건교사 가운을 휘날리며 자못 진지하게 허공을 노려보는 모습은 결의에 차보이기도 한다. 언뜻 보면 B급 히어로물인가 싶은데, 입에 험한 말을 달고 사는 은영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저렇게 욕 잘하는 정의의 사도가 있다고? 근데, 그게 바로 내가 안은영을 사랑하는 이유다.
심사가 삐뚤어진 건지 나는 마블 히어로들을 좋아하면서도 캡틴 아메리카는 정이 가질 않았다. 타인을 위해 날아오는 수류탄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용기, 열악한 신체조건에도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싸우기 위해 끊임없이 입대를 재지원하는 애국심,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정의감은 소시민인 내가 이해하기에는 고차원의 영역이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나에게 너무 이상적이었고, 같은 호모 사피엔스라고 느끼기에는 내가 너무 초라했다.
그에 반해 안은영은 훨씬 인간적이다. 그녀는 사교적이거나 친절하다기 보단 오히려 무신경하게 툭툭 말을 내뱉는 편에 가깝다. 젤리괴물을 없앨 때는 가끔 광기어린 모습도 보인다. "그냥 다 그만두고 싶다"며 힘들어하면서도 은영은 꽤 다정하기도 하다. 옴잡이 혜민을 위해서 밤새 학교 안의 옴들을 다 잡고 위 절제술도 알아볼 만큼 학생들을 살필 줄도 안다.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며 구수하게 XX이라고 욕을 덧붙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의무감과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영웅보다는 훨씬 현실적이었다.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은 뭐, 어떡하겠어, 당해야지 뭐.
어린 시절 은영의 친구였던 강선은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크레인에 깔리는 사고로 죽고 만다. 죽고 나서 은영을 찾아온 강선은 자신은 그런 일이 생기면 떨어지는 크레인을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말한다. 은영은 사고로 죽은 강선과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젤리로 뒤덮인 세상 속에서 젤리를 없애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 피할 수 없는 (혹은 없었던) 서로의 운명에 대해 은영과 강선은 이렇게 말한다.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을 어쩌겠어, 당해야지."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을 당한다는 건 수동적이고 나약한 태도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영혼이 부서지면서 강선은 은영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칙칙해지지 말 것을 당부한다. 어린 시절의 강선도 은영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너는 말이야, 캐릭터 문제야. 그럴수록 칙칙하게 가지 말고 달리는 모험 만화로 가야해. 그러면 애들이 싫어하지 않을 거야. ... 다치지 말고 유쾌하게 가란 말이야. 사람들한테 사랑받으면서 살라고.
살면서 내가 싫어하는 일들을 다 피하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편안하고 행복한 인생은 없을 것 같다.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하기만 하고, 귀찮고 재미없는 일들도 꾸역꾸역 해내는 게 어른의 삶이라는 걸 깨달은 뒤로 때때로 찾아오는 무기력함은 일상을 환기할 기운도 앗아가 버린다. 하지만 똑같은 삶이라도 안은영의 젤리퇴치 이야기가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공포물이 아니라 현실적이고도 가끔은 상큼한 히어로물인 것처럼, 나도 조금은 유쾌한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