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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섬세 Jan 10. 2021

엄마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 중 <가리는 손>을 읽고

김애란 작가는 한국 사회의 면면을 반영하는 구슬프지만 아름다운 소설을 쓴다. 문장을 읽고 있으면 어떻게 이런 묘사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울한 단편들을 읽고 악몽에 시달리는 일도 적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이야기가 내 감정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바깥은 여름>에서 가장 마음을 울린 작품은 <가리는 손>이었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다.


일터에서건 집에서건 밥 짓는 건 말 그대로 노동이고 어느 땐 중노동이었다. 아주 단순한 요리라도 그 안에는 장보기와 저장하기, 씻기, 다듬기, 조리하기, 치우기, 버리기 등 모든 과정이 들어가야 했다. 수백 명의 밥을 차리고 집에 와선 완전 녹초가 돼 정작 나 자신은 컵라면이나 빵으로 끼닐 때울 때도 적지 않았다. - 198쪽


요즘 재택근무를 하면서 집에서 밥을 먹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끔 설거지도 하고, 어쩌다 한번 청소기를 돌리면서 집안일에 소박하게나마 참여한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과 반찬을 당연하게 먹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엄마의 가사노동을 “도와준다”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곤 했다. 엄마에게 매달 30만 원의 생활비만 주면서 그것이 마치 밥값인 양, 엄마가 해주는 밥을 당연하게 먹을 권리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가끔 피곤한 엄마가 “너 설거지 너무 안 한다”라는 말을 하면 “난 일하잖아!”라며 핀잔 섞인 투정을 부리곤 했다. 일하는 게 벼슬도 아닌데, 엄마가 해주는 밥은 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엄마의 사랑인데, 나는 나도 모르게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재이를 봐준 덕에 나 역시 모처럼 사람답게 자고, 밥도 사람처럼 식탁에 앉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 중 하나는 내가 하지 않은 밥이라는 것도 알았다. - 202쪽


엄마와 나는 여행을 굉장히 좋아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거의 매년 해외로 함께 여행을 다녔다. 엄마는 세상의 다양한 명소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남이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며 아이처럼 웃곤 했다. 삼시세끼 밥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행복하다며.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엄마한테 밥을 사준 적은 있어도 요리를 해준 적은 언제였더라?



노후를 생각하면 늘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연봉으로 몇 살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데... 우아하고 호사스런 말년을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청결과 위생에 대한 불안은 자주 일었다.  ... 변기와 이불과 창틀을 지금 수준으로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깨끗하게 살려면 돈이 있어야겠구나. ... 늙어 요양원에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거겠지. 돈으로도 감출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이 있을 테고. 당장 내 엄마만 봐도 그랬다. 언젠가부터 그 말끔하던 고향집이 어수선해지고 엄마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에서 좀 심하다 싶게 자주 머리카락이 나왔다. 처음엔 엄마가 기력이 달려 집안일을 안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내 눈엔 잘 띄는 얼룩이 엄마 눈엔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시력이 약해진 엄마 입장에선 먼지를 안 치우는 게 아니라 먼지가 존재하지 않는 거였다. - 200, 201쪽


올해 엄마는 환갑을 맞으신다. 요새 가끔 들어 엄마는 자신이 너무 늙고 기력이 쇠하면 굳이 함께 살 생각하지 말고 요양원에 보내라는 말을 한다. 나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나는 그런 말은 말라고 역정을 내지만 하나둘 주름이 늘어가는 엄마를 보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한다. 나보다 힘도 세고, 작은 머리카락도 금방 발견하고,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엄마가 자신의 몸을 온전히 가누지 못할 때를 말이다. 나라면 내 몸이 약해지는 설움만을 오롯이 느낄 것 같은데 엄마는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한다. 엄마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이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평소의 대화에서 엄마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에 나는 책의 이런 말들이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잘해드릴 수 있을 때,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 때 더 표현해야지 마음을 먹으며 책을 덮는다.


김애란 소설 <바깥은 여름>, 출처: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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