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배우기 _11.18

by 소산공원

오늘은 갑작스레 집에 혼자 있게 되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에 뭘 할까 고민을 해봤는데.. 딱히 할 것이 없다. 제일 하고싶은 것은 왜인지 가구 옮기기였는데 이 밤에 침대를 들어 옮길 순 없으니 패스. 술은 늘 먹던대로 먹을 것일테고.. 집에 도착하고도 뭘하지.. 하면서 설거지를 하고, 뭘하지 하면서 빨래를 개고.. 기껏한다는 것이 문을 열고 화장실에 간 게 전부다. 잘 때 침대에서 대각선으로 자야지. 혼자 있는 게 이리 별 게 없다니. 이럴 땐 친구들이 가까이 살지 않는 것이 아쉬워진다.


이번주는 정말 무사히 적당히 일을 하면서 보냈다. 일 하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일을 하지 않는 편이 역시나 훨씬 더 좋다. 이 계절 치고 조금 더 일이 있어야 안전하지만... 그렇지만 지금이 정말이지 좋다니까! 인쇄소 감리를 두번이나 가고, 낮술도 마시고, 중앙시장도 가고, 소파에서 뒹굴거리기도 했다. 소파를 사니까 사무실 생활이 4.5배 정도 좋아진 것 같다. 맘 놓고 피곤해져도 될 것 같달까. 침대있는 회사를 조심하라고 했는데...


아침에 일찍 깨게 되면서 낮잠자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잠을 자지 않으면 오늘같이 자유로운 밤에도 또 10시 30분에 자게 될거다. 친구들하고 즐겁게 술을 먹다 곯아떨어질지도 모른다. 낮잠이란 언제나 몽롱하고 기분나쁜 무언가였는데, 이제는 정말 낮잠이 필요하다. 낮에 졸음이 몰려올 때 금방 잠깐 잠에 빠지고 다시 개운한 상태로 만드는 연습. 새 몸에 맞는 새로운 생활의 습관들이 필요할 것 같다.


겨우 7시에 잠에 깨는 걸로 왜 이렇게 유난을 떠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나는 단 한번도 8시 이전에 자발적으로 깨본 적이 없다. 학교다닐 땐 당연히 거의 매일 지각을 했다. 심지어 학교 근처까지 가놓고 학교 앞에 사는 친구네 집에서 더 자다 간 적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아침에 출근해야할 때는 졸음운전을 하며 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잠이 많은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아침잠에서 고통스럽게 깨는 것을 기본값으로 30년 넘게 살아왔다. 그러니까 이 아침의 눈 번쩍은 낯설고 당황스러운 일이다. 아침이라는 건 별로 가져본 적이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이냐가 요새의 화두. 민영언니를 만날 때는 아침수영을 해야하나봐, 시내랑 얘기할 땐 아침기도를 해야하나봐, 뉴스레터를 받을 땐 좋은 글을 읽어야하나봐 한다. 일단 가장 쉬고 가까운 것부터 시작을 해봐야겠다.


오늘 아침에는 요새 좋아하는 멜론 매거진을 보다, 최백호 아저씨 이야기를 발견해 몇 곡을 듣다, 우연히 온스테이지 무대까지 보게 되었다. 최근 나온 앨범에 '책'이라는 스페셜 트랙을 부른 영상이 있었는데, 으앜 가사가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았다. 출근길에 여러번 들었는데 또 눈물이 줄줄 났다. 어느 길에 들어서면 갑자기 이상한 버튼이 작동하는 것처럼 감정이 고장나버린다. 이게 한 두번이 아니라 좀 많이 이상하다.


'책을 잃으면 머리카락 한 올이 돋아나는 것 같아.

아주 큰 무엇은 아니고 딱 그만큼만 아주 작은 그만큼만.

그래도 옷에 묻는 흙을 털고 신발 끈을 조여매는 힘은 생기지'


이제는 더이상 책을 읽는 것으로, 세상과 나의 변혁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머리카락 한 올 돋아다는 것. 아주 조금이라도 새로운 무언가가 태어나는 것을 어찌 이리 표현할 수 있을까. 새롭게 나아가진 못하겠지만 지금의 자신의 더러움을 털어내고 지켜낸다는 말.


'노래도 그래. 먼 기적소리처럼 가슴 뛰던 젊은 날의 울림은 아냐.

그냥 헌 모자 하나 덮어쓰고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 가고 싶은 정도이지'


ㅠㅠㅠㅠㅠㅠㅠㅠ 또 더이상 인생을 뒤집을만한 가슴뛰는 경험을 하진 못할테지만. 아름다운 풍경에 편안한 몸으로 가서 천천히 오래 그리워할 수 있는 것.


'아직은 눈물 흔적 지우고 살아, 내가 그래, 당신은 어때'


나는 오늘도 울고, 어제도 울었는데 아저씨도 아직도 운다는 뜻이죠?

그게 흔적으로만 남지 않았다는 말이겠죠?

아님 멀리 오래 전 울었던 슬픈 날 안에서만 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건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면 괜찮아진다는 말인거죠?




별로 특별할 것 없이 또 벌써 졸리다. 오늘 아침에 좋은 노래를 듣게 해주었으니 이 밤을 양보한다. 대신 내일은 용서 못해. 전태일평전 읽기 모임이 미뤄진 순간부터 책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을 읽으면 내 머리카락 갯수만큼 가슴에 생채기가 나는 것 같다. 그치만 오늘도 아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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