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까낸 단감은 말갛게 고왔다. 감을 예쁘게 까면 예쁜 딸을 낳을 거란 속담이 있다면, 나는 적어도 상도동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 최고의 미인이 되었을거다. 맨질맨질하게 굴곡없는 표면. 엄마는 앉은 자리에서 감 5개를 예쁘게 까고 그 중에 4개를 먹었다.
김장을 하는 내내 엄마는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옆집 아줌마와 아저씨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동네의 한 집 한 집을 훑고 올라가선, 산을 넘어 마을 중턱에 사는 이모 이야기, 산 아랫마을에 사는 할머니와 외숙모와 사촌들의 이야기, 차로 30분 정도 넘어가면 있는 구온양의 엄마 친구 이야기를 끝없이 해댔다. 엄마의 말 안에선 세동리-추계리-구온양에 사는 사람들은 끝없이 연결되었다. 그들의 작은 불행들은 결국엔 엄마의 한 줌도 되지 않는 행복을 건져내는 뜰채가 되었다. 그래도 식구끼리 모여서 밥이라도 먹어야 살 맛이나지, 라며 자신의 처지를 긍정하는 말을 길어올렸는데, 그 자리에는 뺀질거리는 우리집 남자들은 아무도 없었으니 그 말을 누가 믿을까 싶었다. 이렇게 엄마의 말은 또 그들의 뜰채가 될테지. 시골에 사는 엄마는 말이 많고 시끄럽다. 나는 갓을 따고, 배추를 씻고 파를 썰고 다듬는동안 편안함을 느끼며, 거의 한마디도 먼저 말하지 않는다. 엄마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10대 시절, 엄마와 어떤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에 나지 않는다. 도시에 살던 엄마는 매일 TV로 홈쇼핑을 보며 뭔가를 사거나 반품을 했다. 집엔 수납장보다 물건들이 많아 구석마다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아침의 늦은 등교길 중에 엄마의 출근시간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항상 잠을 잤다. 아침엔 잠을 자거나, 밤엔 울고 있었다. 잠자거나 울지 않는 기억 속엔 종종 엄마가 해준 밥들이 있다. 버터를 잔뜩 넣은 김치볶음밥을 손에 잡히지 않는 크기의 주먹밥으로 만들어 은박지로 꼭꼭 눌러 챙겨주던 것. 반장 턱을 내야하는데 피자 사줄 돈이 없다며 싸준 김밥 30여줄. 그 속에 꽉 들어찬 맛살과 달걀지단. 봉명동 구석, 8평도 되지 않던 가게를 얻어 꽃게와 멸치를 잔뜩 넣어 끓여 팔던 칼국수.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가서 먹던 기억. 삼촌이 빌려준 트럭 위에서 팔던, 할아버지의 쌀로 만든 떡볶이와 붕어빵. 그런데 엄마는 요리하는 걸 즐거워했던가? 나는, 우리 가족들은 그걸 기꺼이 감사하게 먹었던가? 정말이지 잘 기억에 나지 않는다. 엄마의 뭔가를 씹어 삼켰던 기억. 서로를 부득부득 갉아먹었던 기억.
그러다 내가 20대 초반일 무렵. 엄마와 아부지는 삶의 마지막 도망을 치듯 엄마의 고향 동네로 귀농을 했다. 집에 있는 짐이 하나둘씩 조용히 사라지고, 마침내 눈에 띄는 가구들을 옮길 무렵, '우리 시골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무렵 독립에 실패해 우울했는데, 엄마와 아부지가 독립을 해버리다니! 더 이상 그들을 매일 보지 않아도 되는구나! 행복했다. 부모님의 귀농은 그나마 우리가 여전히 가족일 수 있게 하는 좋은 선택이었다.
시골에 간 엄마는 말이 많아졌다. 키우는 닭들이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이야기. 나무에 구름처럼 자라던 버섯이 얼마나 예쁜지, 마당에 뿌려놓은 매발톱이며 백합이 얼마나 고운지. 엄마는 전화로 조잘조잘 얘기해댔다. 살림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가난에도 질이 있다는걸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엄마는 꽤 요리를 잘하고 즐겁게 하는 사람이란 것도. 요리는 엄마가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기획과 창조의 영역이었다. 내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엄마를 닮은거였구나. 엄마는 인터넷을 뒤져 새로운 재료들을 마구 찾아내고,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레시피로 요리를 하곤 자신이 맛있게 먹건 말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즐거워한다.
이번 밥상에, 엄마는 유튜브에서 어느 유명한 쉐프의 레시피를 보고 만든 동치미를 내놓았다. 그건 그간 맛봐온 중 가장 훌륭한 동치미였다. 나는 동치미의 정석, 대회용 동치미라며 모든 친구들에게 이 동치미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고 설쳤다.(실제로 그랬다!) 엄마는 웃기고 있네 하면서, 김장을 하며 바쁜 와중에도 무를 더 뽑아 씻었다. 올 겨울은 동치미의 계절이 될 것 같다.
그렇게 조잘거리며 김장을 하는데 또 속이 모자랐다. 어린 아이 3명이 들어가 수영을 해도 될 것 같은 커다란 고무 다라가 꽉 차도록 속을 만들어놓고는, '어라 속이 부족하네'를 본 것만해도 3년 째. 결국 배추의 1/3 정도를 남기고 도우러 온 사람들의 밥을 먹여 보내고 새 속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가고 어제 했던 일을 또 반복.밭에서 갓을 따고, 파를 까는 와중에도 엄마는 남은 재료로 누구를 위해 파김치를 만들고, 누구를 위해 무김치를 만든다는 둥 얘기를 한다. 나는 그러다 엄마가 파김치가 될 것 같다며 제발 실속없는 짓은 그만하라 얘기한다. 그치만 소용이 없다. 그것은 엄마가 신세를 졌던 사람들을 향한 일이다. 어려울 때 나의 교복을 사주었던 이웃, 입학할 때 마다 가방을 사주던 이웃, 10년도 전에 받았던 사소한 도움들을 하나씩 말하며, 무 김치 그런건 별 것도 아니라 말한다. 그나마 도시의 엄마를 살려냈던 사람들. 그 깊은 고마움을 몇 년 째 가을. 같은 방식으로, 배추 포기도 세지 못한 채 그렇게 갚아 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실속없는 엄마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함부로 흘려놓은 빈 그릇들을 주워담아 설거지를 했다. 엄마는 남은 김장을 하는 동안 유튜브에서 새로 본 레시피를 또 조잘거렸다.
동치미며 무김치며 김장 수육이며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길. 이젠 엄마가 이웃의 불행없이도 행복을 건져낼 수 있다는 걸 조금은 안다. 엄마처럼 늙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