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산공원 Jul 11. 2022

기운을 길어올린 날-7월 11일

지난주에 생리통에 온통 기운을 빼앗겼다. 운전하기는 것도 힘들고 마침 디자인할 게 없어서 도서관으로 출근. 아침부터 사람이 많다. 도서관은 조용하고 깨끗하고, 무언가 몰두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발달장애인이 일하는 저렴하고 맛있는 커피집도 있다.  커피를 사들고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사업보고잡지 만들기는 이제 중반기에 접어들었다. 수정원고를 검토하고, 교정교열을 맡아주실 분과 소통하고, 디자이너에게 보낼 파일을 정리했다. 완성된 글들을 직접 인디자인에 얹혀보면서 목차를 짰다. 이번엔 내가 직접 디자인하지 않을거라 최대한 작업하기 좋게 전달하는 것이 목표.

 디자인 일을 맡을 때, 왜, 도대체 왜 엉망진창의 원고를 주는지 항상 궁금했는데, 이 일을 해보니 원고를 정리해서 전달하는 일이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  '원고의 완성'과 '디자인결과물' 사이에, '디자이너에게 전달'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 별도로 필요하다는 걸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사업계획서를 던져주거나, 목차구분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모은' 원고들을 보내주기도 한다. 그럴 땐 원고를 정리해서 보내달라고 하는데, 그 정리가 어떤 말인지 잘 모르거나, 디자인을 보고난 이후에 수정을 하겠다는 사람도 많다(후 쓰면서도 빡치네) 결국 못참고 나서서 목차를 정리해 주거나 통일된 양식을 제안하는 일을 하곤했는데 그게 일종의 편집의 과정인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아무튼 사람들은 이 과정을 모르거나, 그 일에 시간 내는 일을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크던 작던 좋은 작업과정을 위해선 편집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좀 경험이 쌓이면 천안의 작은 단체나 기관을 대상으로 편집이 필요한 작업물들을 디자이너와 함께 만드는 방법... 뭐 이런 워크숍해보고 싶다.


엄마가 준 단호박을 쪄서 도시락으로 챙겨 밥을 먹었다. 도서관에서 밥을 먹으니까 거쳐왔던 도서관들이 생각났다. 편하게 글을 쓰고 싶어서 카페로 이동. 오랜만에 0334에 다녀왔다. 0334엔 내가 고를만한 책, 내가 살만한 소품, 내가 틀만한 음악들이 나온다. 갈 때마다 가벼운 책 한권을 골라 조금씩 나눠 읽는다. 양다솔의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을 읽다 깜짝 놀랐다. 이렇게 재미있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행자에게는 한 줄의 명심문이 있다. “네, 하고 합니다’ 그것으로 내가 가진 의지를 내려놓는 연습, 내가 아닌 존재로 살아보는 연습을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불교의 법은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온다고 믿는다. 그곳에서 싫은 상대를 만난다면 그는 원수가 아니라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불보살, 즉 은인으로 불렀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자신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어떤 습관에 지배받는 살펴보아야 했다. 내가 행동을 바꿔야 한다면 누가 나를 싫어해서가 아닌 바로 나를 위해서여야 했다.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하지?’에서 ‘나는 왜 이 행동을 하고 싶지?’로 질문이 바뀌는 데는 꼬박 2년이 걸렸다. 그곳에서 ‘그냥’살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매 순간 기억해야 했다.

<양다솔,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중>



"네, 하고 합니다"를 책상 어딘가에 적어두어야겠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유형은, 취향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대답해야하는 세상에서 그냥 내가 가진 의지를 내려놓는 연습이라니. 싫은 무언가를 하면서,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것들을 살펴볼 수 있다니. 참 수련의 자세가 아닌가.




책 읽고, 몇 가지 일을 정리하고 보니 기운이 좀 났다. 집에서 뭉근히 익어가는 바나나와 엄마가 보내준 생고사리가 생각나 장을 보러갔다. 하나로마트로컬푸드에 가니 호박, 쌈채소, 가지 같은 여름 채소들을 헤프게 싸게판다. 이 뙤약볕에서 일을 하고 저 값으로 팔아서 뭐가 남을까. 천원짜리 애호박을 사고 육만원어치 기름을 넣고 집에 돌아왔다.

돌아와서 밥솥을 꺼내 바나나케익을 만들고 웅이가 가져온 닭으로 닭개장을 끓이는데.. 끓이는데......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다신, 다신 에어컨없는 여름에 펄펄 끓이는 음식을 하지 말아야지. 세번 샤워를 하고도 입맛이 뚝 떨어져 바나나케이크랑 와인을 한 잔 먹었다.



요새는 저녁에 온 방에 불을 다 끄고 스탠드 하나 켜고 지낸다. 벌레가 꼬이는 것도 싫고 불을 환히 켜놓으면 괜히 더 더워지는 느낌이 들어서다. 며칠 지내고 보니 운치있고 잠이 일찍 와 한동안은 이렇게 지낼 것 같다. 다북에서 산 심재휘의 시집의 뒷부분, 강릉에 대한 시만 여러번 읽는다. 익숙한 지명들이 나와 반갑다. 시인은 강릉에서 보낸 어릴 적 기억을 주로 쓰는데 정서의 고향 안에서 말을 길어내는 느낌이다. 나도 오래오래 퍼내어 옮기고 싶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있다. 이야기로 말하자면 전개와 맥락이 없고, 그저 감각으로 남아있는 단편적인 기억이라 시라는 장르가 꽤나 적절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아 2주만 있으면 바다에 갈 수 있다. 강릉에 갈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것을 너도 세상에 돌려주고 있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