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_09.16

by 소산공원

아침인사 대신 기침으로 출근. 사무실 근처에만 가면 기침이 나는거보니 아무래도 심리적인 요인이 큰 듯하다. 어제는 하루종일 사무실에 있게 되어 평온함을 느꼈는데, 이틀 이상 유지할리가. 급한 일을 처리하고 나니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시내랑 예산으로.


저고리가에 잠깐 들려 음식과 약을 전달하고 재식이 커피로 갔다. 재식이가 맛있는 요거트를 공으로 주었다. 히히. 섭외 때문에 한 걱정이었는데, 이번주를 해결하고나니 그리 큰 어려움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안일한 생각. 여튼 첫 고비를 넘긴듯하여 기분 좋게 일했다. 햇빛이 좋은 자리에 앉아서 서로 얼굴에 내려앉은 햇빛을 찍어주며 일렁일렁.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렸다. 선우정아 노래를 크게 들으면서 갔다. 다음주 책모임만 아니면 살 것 같은데. 아무도 책을 안 읽었을 거라 예상이 되어, 다른 방식으로 모임을 하자고 시내랑 작당모의를 했다. 분명 책을 나눠 읽고 싶어서 모임을 시작했는데, 왜 막상 시작하면 책에서 도망치고 싶어질까. 여튼 읽기로한 책은 스킵하고, 각자가 읽고 좋았던 소설을 서로에게 추천해보는 것을 제안. 말을 뱉음과 동시에 어떤 소설을 말할지 가슴이 콩닥.


시내랑 호두와트를 얘기를 하면서 나의 수행공간이라고 말했더니 점점 언니의 그릇만 넓어진다는 얘기에 빵터져버렸다. 옛날옛날 임금님이 주신 술잔을 두드려 넓히는 정승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차피 가진 질량은 똑같을 테지만 경계를 얇게 다듬고 큰 그릇을 만들어주는 친구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이소라랑 박지윤이 번갈아 재생되는 노래를 들으면서 왔다. 몽골 마지막 날 음악을 들으면서 수염이 목소리의 속성에 대해서 얘기해준 이후로 노래 듣는 일이 3배정도 즐거워졌다. 예를 들어 곽진언은 나무와 흙의 목소리, 이소라는 바람이지만 구름 안에 있는 바람 목소리, 박지윤은 오솔길목에 바람 같은 목소리. 시와는 커다란 설악산 바위같은 목소리, 옛날 권나무는 파도 안에 갇힌 햇빛 목소리. 소리의 공간들을 마구 상상하는 즐거움.


집 근처에 오니 멀리 번개가 번쩍번쩍 하길래 급히 꼬냑을 챙겨 산책. 강변에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서 쬐꼼씩 아껴먹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길래 집으로 돌아가는데, 비는 멎어도 습한 공기에 푹신하게 젖어버렸다. 리틀포레스트의 다이빙이 생각나는 습기. 높은 바람이 쐬고 싶어서 석탑이 있는 계단에 올랐다. 몇 계단 오르다보니 쬐꼼 무서워졌는데 마침 거미가 길을 막았다. 그 자리에 앉아서 시끄러운 나무들을 보며 또 꼬냑을 한모금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거울




집에 와선 간만에 야식을 해먹었다. 사실 설거지를 한 것도 너무 오랜만이다.

아, 설거지하니까 생각나는 에피소드. 최근 몇 년, 나는 뺀질나게 이직과 이사를 하는 동안 웅이의 일상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글을 며칠 전에 올린 적이 있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냐고 묻자, 웅이는 안그래도 나를 보면 자신이 고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뭐라도 빨리 해보려고 방법을 찾다가 나처럼 설거지를 빨리 해보기로 결심. 그런데 자꾸 컵이 깨진다고,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고 한다. 도대체 나의 인생의 속도와 설거지를 빨리 하자는 결심이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모르지만ㅋㅋㅋㅋㅋ나는 웅이가 한 느릿한 설거지가 좋다. 빛이 총총 맺힐정도로 깨끗한 컵과 화병. 도대체 어떻게 하는거지? 나도 웅이를 따라서 느리게 몇 번을 해보았는데 절때 그 광을 낼수가 없다. 그니까 자신에게 알맞은 속도와 광이 있는거다.



여튼. 김치고명을 올린 간장국수를 해먹고 오랜만에 바게트호텔잔으로 맥주. 무료한 김에 넷플릭스에 뜨는 화양연화를 봤는데. 뜨악. 화면 안으로 고개를 쳐박고싶을 정도로 좋았다. 시공간을 이동한다면 바로 저 곳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xox.

느리게 흘러가길 바랐던 그 시간들의 조각조각. 저 순간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면서 처음 해봤다. 혼자 막 소리를 지르면서 Quizas가 나오면 춤을 추면서, 사정없이 몸을 움찔거리면서 보았다.

옛날 노래들을 좋아하지만, 홍콩영화의 감성을 모르고 재미있게 볼 수 없단 사실에 묘한 패배감 같은 것이 있었는데, 오늘부로 뭔가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용주샘이 양조위 나무에서 속삭속삭, 하던 얘기도 이제 뭔 말인지 알아버렸어. 아 속삭속삭. 당장에 큰 나무 구멍을 찾으러 나가고 싶었다.

벽이라도 뚫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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