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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마지막 감각

가장 좋은 텔러는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by 성민기

수십 년째 말을 하고, 또 누군가의 말을 듣는 일을 하다 보니 말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어떻게 하면 말을 더 잘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오래 지켜보면 볼수록 ‘잘 말한다’는 기준이 시간이 갈수록 조금 달라진다.

정확한 발음과 또박또박한 문장을 칼처럼 구사하는 사람도 좋고, 사투리를 섞어가며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도 좋다. 그러나 결국, 화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상대에게 도달하는가?’ 그것이 본질이다.


이 모든 경험을 지나면서 깨달은 것을 정리해 보면, 가장 좋은 텔러는 자연스럽게 또 자기답게 말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말을 잘하기 위한 마지막 감각은 언제나 자연스러움에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자연스러움은 태도에서 온다

많은 사람이 자연스러운 말하기를 성격이나 타고난 재능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말투는 정교하게 ‘만들어지는 감각’이다. 억지로 꾸미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 준비 없이 던지는 것도 아니다.

청중은 단어보다 먼저 화자의 마음 상태를 읽는다.

말하는 사람이 마음이 불안하면 말도 서두르고, 마음이 불편하면 톤이 흔들리기 쉽고 표정도 경직된다. 그래서 자연스러움은 화자의 편안한 태도에서 시작된다.


정확한 말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말’이다

무대 위에 서면 많은 사람이 말을 실수하지 않으려고, 문장을 정확히 읽으려고, ‘잘 말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 말은 듣는 사람에게 어딘가 낯설고, 조금은 불편한 긴장을 준다. 말의 기술은 뛰어나지만 마음이 비어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달변가는 신뢰를 크게 주지 못한다. 말하기는 정확함이나 유창함의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정보를 받아들일 때 ‘처리하기 쉬운 정보’ 일수록 더 자연스럽고 더 매력적이라고 느낀다고 말한다. 이를 Processing Fluency(처리 유창성)이라고 한다.

청중은 자기 말로 솔직하고 편하게 말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큰 신뢰가 생긴다. 사투리를 써도 좋고, 말이 조금 느려도 좋고, 생각을 정리하며 잠시 멈춰도 괜찮다.


자연스러운 말은 듣는 사람의 머리와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그렇게 말이 부드럽게 흘러가고, 억양과 단어가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순간, 청중은 부담 없이 말의 흐름을 따라간다.

자연스러운 말은 리듬을 가진다

또한, 말은 음악과 비슷하다고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말은 단단하고, 어떤 사람의 말은 부드럽다. 하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자연스러운 말에는 리듬이 있다.

언어학에서는 이를 Prosody(운율·억양·리듬)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람의 뇌는 단어보다 먼저 리듬을 듣는다. 말이 너무 빠르면 불안함을 느끼고, 말이 과하게 느리면 집중이 흐트러지고 답답해진다

자연스러운 리듬은 억지로 맞추는 리듬이 아니라 자기 호흡에서 나오는 리듬이다.

문장을 짧게 끊어주고, 호흡을 두고, 감정을 과하게 싣지 않는 것만으로도 말의 결이 부드러워진다.


자연스러운 말은 그림처럼 떠오른다

인지심리학의 Dual Coding Theory(듀얼 코딩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언어 정보만 들었을 때보다 언어와 이미지가 함께 떠오를 때 더 자연스럽고 쉽게 이해한다고 한다.

실제로 정말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람의 특징은 말이 ‘그림처럼’ 떠오른다는 것이다.
복잡한 비유 없이도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진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자기 말로 말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설명이 사라지고 핵심 이미지가 그대로 전달되어 청중이 두 가지 코드(언어+심상)로 정보를 저장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람은 결국 ‘상대’를 본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스러움은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말하는 사람일수록 청중의 표정을 더 자주 본다.

말의 속도, 호흡, 강약을 상대의 반응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절한다.

이러한 능력은 심리학의 마음 이론(Theory of Mind)적 능력에 기반한다.

화자는 청중의 인지적 부하이해도를 실시간으로 추론하며 소통한다.

자연스러움은 언제나 내 말과 상대의 마음이 같은 속도로 흐를 때 비로소 완성된다.


말의 마지막 감각은 ‘자연스러움’이다

말하기는 기술로 시작하지만 마지막 한 끗은 언제나 감각에서 결정된다.

그 감각은 예쁘게 말하려는 노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더 많은 단어를 아는 데서 나오지도 않는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과 말의 흐름이 서로 어긋나지 않을 때, 그리고 그 흐름이 듣는 사람의 호흡과 맞춰질 때
비로소 자연스러움이 생긴다.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람은 자기 말속에서 편안함을 만들고 그 편안함을 상대에게도 잘 전한다.

듣기 좋은 말은 늘 자기다움의 태도와 자연스러움에서 완성된다.

오늘부터 나답게, 힘 빼고 자연스럽게 얘기해 보는 건 어떨까?


참고문헌

Cutler, A. (2015). Prosody in Speech Processing. John Benjamins Publishing.

Alter, A. (2013). Drunk Tank Pink: And Other Unexpected Forces That Shape How We Think, Feel, and Behave. Penguin Press.

Paivio, A. (1971). Imagery and Verbal Processes. Holt, Rinehart and Winston.

Premack, D., & Woodruff, G. (1978). “Does the chimpanzee have a theory of mind?”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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