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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Humor)의 힘

공기를 바꾸는 가장 인간적인 기술

by 성민기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웃음이 있는 자리에는 좋은 일이 모인다."라는 옛말처럼, 웃는 얼굴은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어준다.

유머는 누군가를 웃기기 위한 기술이라기보다 주변의 공기를 환기시켜 마음의 문을 여는 힘에 가깝다.

사람이 따뜻함 앞에서 경계를 내려놓는다는 사실은 동서양의 오래된 지혜와 현대 심리학이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진실이기도 하다.


유머의 뿌리는 ‘감정의 흐름’에서 시작된다

‘유머’라는 말은 라틴어 humor, 즉 몸 안에서 흐르는 체액에서 비롯되었다.

고대의 4 체액설(Four Humors)은 사람의 기질과 감정 상태가 이 네 가지 체액의 균형으로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 개념이 시간이 지나 사람의 분위기·성향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고, 결국 오늘날의 부드러운 웃음과 분위기를 만드는 능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즉, 유머는 처음부터 사람의 감정을 흐르게 하고 공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정서적 장치였다.


진솔한 유머는 공기를 바꾼다

유머 중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방식은 자기 자신을 조금 가볍게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저도 오늘 좀 떨립니다.”
이 한마디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TED를 연구한 카민 갤로는 가장 사랑받는 연사들이 오프닝에서 자신의 실수나 어색했던 순간을 솔직하게 꺼내는 이유를 청중과의 심리적 거리를 단숨에 줄이기 위한 전략으로 설명한다.


심리학자 로드 A. 마틴도 많은 사람이 매력을 느끼는 유머는 풍자나 공격이 아니라 진솔함에서 나온 유머라고 말한다. 그래서 유머는 완벽함보다 인간적인 흔들림에서 더 잘 피어난다.


유머는 ‘새로운 감각’을 만든다

신경과학자 A.K. 프라딥 박사는 인간의 뇌가 예측 불가능한 순간에 가장 크게 반응한다고 말한다.

유머는 흐름 속에 작은 비틀림을 넣음으로써 뇌가 좋아하는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준다.

이 때문에 유머가 들어간 메시지는 더 쉽게 기억되고 더 깊이 각인된다.

TED 강연에서 작은 농담이 청중의 시선을 재점화하는 이유도 이 구조다.


유머는 말의 기술을 넘어 ‘온도 조절 장치’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화자를 판단할 때 유능함보다 먼저 따뜻함을 읽는다고 말한다.

유머는 이 따뜻함을 전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말은 똑같아도 공기가 부드러워지는 순간 메시지의 무게가 달라진다.

그래서 유머는 관계를 여는 환기 장치에 가깝다.


유머는 리더십의 핵심 신호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유머가 조직의 긴장을 낮추고 갈등을 자연스럽게 완화시키며 어려운 의견을 부드럽게 전달하는 힘이 있다고 설명한다.

한 연구에서는 ‘뛰어난 임원’으로 평가받은 사람일수록 그렇지 않은 임원보다 유머를 두 배 이상 자주 사용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유머 사용량이 많을수록 실제 성과도 높았다.

즉, 리더십에서 중요한 건 얼마나 웃기는지가 아니라 상황을 읽고 적절한 순간에 유머를 쓰는 감정지능(EQ)이다.


세계가 증명한 ‘유머의 힘’

유머는 세계적인 연사와 리더가 반복해서 선택한 기술이다.


•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One more thing…”

그는 예상 밖의 한 문장이 발표장의 공기를 단번에 바꿨다.

타이밍과 반전발표가 끝났다고 모두가 예상하는 순간, 예측 불가능한 짧은 문장을 던져 청중의 긴장을 재점화시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청중에게 '선물'을 주는 듯한 느낌을 주어, 청중을 단순한 관객이 아닌 공범자 또는 특권층으로 만들었다. 이는 브랜드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을 설계하는 기술이다.

유머 자체라기보다는 극적인 연출과 기대의 역이용을 통해 감정의 흐름(Humor)을 뒤흔들고, 발표의 극적인 절정을 만들었다.


• 오바마(Barack Obama)의 자기 비하 유머 (Self-deprecating Humor)

강한 권위를 ‘부드러운 인간미’로 전환시키는 예술 같은 순간이었다.

자기 비하 유머 (Self-deprecating Humor) 국가 최고 리더로서의 강한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고 자신의 약점이나 평범함을 노출시켰다.

청중과의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려 '우리 중 한 사람'이라는 친밀감과 인간미를 전달했다.
이는 정치적 반감이나 경계심을 크게 낮추는 공감대 형성 기술이다.

또한, 공격적인 유머나 풍자를 피하고 진솔함에 기반하여, 자신이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리더임을 무의식적으로 각인시켰다.


• 켄 로빈슨(Ken Robinson)의 메시지 통합형 유머

영국의 교육학자 켄 로빈슨은 TED강연에서 복잡한 메시지도 진솔한 유머로 거대한 공감을 만들어냈다.

TED 강연의 핵심 주제인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처럼 복잡하고 무거운 메시지 사이에 개인적인 경험이나 일화를 활용한 유머를 삽입했다.
유머를 통해 청중에게 '숨 쉴 틈'을 주어 피로도를 낮추고, 핵심 메시지에 대한 수용성을 높였다.
복잡한 아이디어를 쉽고 기억하기 쉬운 형태로 만들어 대중적 공감을 설계했다.

그리고 연사의 진정성을 바탕으로 청중과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며, 연설에 대한 청중의 몰입도와 집중력을 재점화하는 기술을 보여줬다.


• 순다 피차이(Sundar Pichai)의 긴장 완화 및 심리적 안정

알파벳과 구글의 최고경영자 순다 피차이는 어린시절 이야기를 통해 조직 내부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며 분위기를 바뀌게 했다.

공동체 유머 (Shared Experience) 개인적인 경험, 특히 공감 가능한 어린 시절의 실수나 문화적 배경을 소재로 이야기했다.

조직 내부의 경쟁과 긴장 속에서 잠시나마 따뜻하고 인간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는 리더가 '함께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며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설계한다.

결국, 유머를 통해 갈등을 우회적으로 완화하고, 팀원들에게 편안하게 소통해도 된다는 긍정적인 신호를 전달하여 조직 문화를 설계했다.

이들은 유머를 웃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관계를 설계하는 기술로 사용했다.


AI 시대, 유머는 더욱 중요해진다

AI는 논리·정보·정확성에서는 탁월하지만 예상 밖의 타이밍, 상대 표정을 읽고 건네는 가벼운 말, 실수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웃음 같은 인간적 온도(humanness)는 쉽게 복제하지 못한다.


AI가 정보를 전달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온도’다. 그 온도를 만드는 힘이 바로 유머다.

AI가 ‘정확함’을 맡는 시대라면 인간은 ‘온도’를 맡는 시대다.
유머는 그 온도를 만드는 가장 인간적이며 고유한 감각이다.


참고문헌

Gallo, C. Talk Like TED.

Pradeep, A.K. The Buying Brain.

Martin, R. A. The Psychology of Humor.

Harvard Business Review (유머·조직행동 관련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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