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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가연 Aug 10. 2022

너를 잊고 지내다가도 나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떠올라

그림책 존 버닝햄 <알도>를 보고 나서


<알도>라는 그림책을 보며 내가 늘 만나고 싶고 그리워하던 어떤 존재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어린 시절 일기장에 나는 상상의 존재에게 편지와 일기 쓰는 것을 좋아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일기장에만 존재했던 그의 애칭 조차도 잊어버렸다.


그 자리는 때에 따라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는 충남 예산의 이모네 집에 가서 전혀 연고지가 없었던 여자 아이와 친해져서 꽤 오랜 시간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펜팔이 유행했는데, 그 아이와 편지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적어 우리는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그러다 흥미가 떨어지자 점점 뜸해지던 편지가 끊어졌다.


<알도>그림책에서 나는 이 알도가 잊혀진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내가 힘들 때도 나를 위로해주고, 늘 도와주던 옆에 있던 알도 같은 존재를 기묘하게도 때때로 나는 잊을 때가 있었다.


나는 내가 잊어버린 사람들을 때때로 떠올리며 추억한다. 한 때 함께 웃었던 이야기와 먹었던 음식, 함께 걸었던 길과 보았던 풍경... 그 시절 그 순간에는 서로 진심이었고 서로가 위로가 되었다.


<알도>라는 작품을 아이와도 읽어보았지만 알도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다만 <알도>라는 책에 나오는 아이가 생각보다 너무 작다며 안타까워했다. 거대한 엄마에 비해 아이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놀이터에 놀고 싶지만 커다란 엄마에게 끌려 간다.


 존 버닝햄의 알도는 누구였을까. 알도라는 존재는 계속 변화하며 그 시절의 소중한 것을 의미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되다가도 때때로... 알도는 나 자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안에 있는 다른 나, 내가 나와 노는 것처럼 창작을 하듯, 자기 안에 깊숙이 침잠해 자신의 이야기를 적고 그림을 그리는 나 자신이 알도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다.


내 안의 나에 대해, 지독하게 자기 자신에게만 천착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나친 자기애 때문에 시끄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외면하는 이들은 거꾸로 무언가 상실한 듯 멍한 얼굴을 하고 말한다.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돈'을 가장 좋아한다. 돈은 당연히 중요하고 나도 좋아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는 돈이 알도가 될 수도 있을까. 알도가 돈이라면 그것은 어떤 삶이 될까. 상상해봐야겠다.


거대한 여백처럼 알도라는 존재에 여러 가지를 대입하며 읽어본다. 가장 힘든 순간, 내가 잊어버렸던 알도가 찾아온다고 존 버닝햄 아저씨는 말했다.


이 주인공 여자아이에게는 바로 친구들이 화장실에서 괴롭히고 있을 때였다. 우는 여자아이에게 어깨 동무를 하고 달래준다.


부모님이 싸울 때는 알도가 도와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알도가 도와줄 수 없을 정도로... 부모님의 싸우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공포이자 무서운 상황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나의 알도는 무엇일까? 나는 20대 내내 광야에서 '고도'를 기다리던 이야기,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천착하며 읽고 또 읽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주님인지, 성공인지, 죽음인지... 극의 끝까지 오지 않는 고도. '알도'는 쥐인지 토끼인지 동물의 얼굴을 하고 친구처럼 있다. 애착인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알도? 넌 누구야? 아니 무엇이야?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것을 나는 계속 허공에 대고 물으며 상상해본다. 답을 찾지 못해서, 답이 계속 바뀌어서 재미있는  여백의 이야기. 나의 인생 림책 <알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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