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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가연 Jun 09. 2022

토끼가 코끼리와 하마와 함께 사는 방법

여덟 살 평화의 이야기 , 존 버닝햄 <줄다리기>


어젯밤 평화는 꺼이꺼이 울었다. 오늘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데 아이는 이미 등교했지만 평화의 울음소리와 두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흐르던 눈물이 떠올라서 내내 고민이 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그저 우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놀아주고 안아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점점 커가는 평화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지는 것 같다. 뭐라도 돕고 싶어서 고민해보지만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평화는 어릴 때부터 말이 느렸다. 그런 평화는 주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면서 치료를 권하기도 했지만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은근히 나에게 책임을 묻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아이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지금도 그 강렬한 믿음만큼은 설명할 길이 없다.


평화는 기저귀를 다섯 살까지 하고 있어서 어린이집 낮잠도 화장실 앞에서 재우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런 아이의 처지와 상황이 화가 나 대신 싸워주기도 했었다. 어린이집을 몇 번 바꾸기도 했다.


느린 것이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일까. 평화가 웃을 때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 나는 어린이집의 속도와 학교의 속도에 다소 천천히 움직이는 평화가 걸림돌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이의 성향이기도 하고, 엄마인 나의 양육태도도 그런 것 같다. 나는 아이를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에게 빨리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빨리 이 장난감은 가지고 놀고 정리를 하고 다음 놀이를 해야 한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인 내 탓이었을까. 그런지만 나는 그 빠름이 싫었다.


아이는 그런 엄마에게 자라, 천천히 자기 일을 완벽하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학교생활에서 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어제 학교에서 받아쓰기를 하는데, 평화가 느릿느릿 받아 적자 선생님이 평화에게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어''하면서 짜증을 내셨다보다. 반 전체 아이들이 평화에게 시간이 없어 시간이! 라며 놀렸다며 평화는 집에 와서 꺼이꺼이 울었다. 그때부터 평화는 이제 시간이 없다는 말만 나와도 불끈 화를 내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별일이 아닐 것 같은데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 저녁을 먹으러 가는 차 안에서 내내 통곡을 했다. 그러더니 결국 밥을 몇 숟가락 먹다가 배가 아파서 더 이상 못 먹겠다며 식당에서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아이도 자기감정에 앓아눕는구나. 짠하고 마음이 아파 평화를 보며 식사를 하다가 결국 나도 먹던 음식이 한동안 얻혀 가슴을 두들겨야 했다.


어린이들은 얼마나 본능적인가. 우리 아이도, 다른 아이들도 그래서 순수한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아이들이 모여 노는 것을 보다 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더욱 노골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서로를 때리면서 놀거나, 괴롭히고 놀리면서 놀기도 한다. 누가 아이를 천사라고 했는가.


요즘 내 아이의 사회적 관계마저 엄마인 나의 고민이 되었다. 내 일도 머리 아픈데 아이의 일까지도 고민을 해야 하다니 한탄이 나온다. 나 역시 관계에 늘 미숙한 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관계에 대해 많이 고민해본 만큼 평화에게 해줄 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해줄 말을 고르고 또 고르게  된다. 그러다가 만난 그림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다.


존 버닝햄의 <줄다리기>는 그런 평화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이다. 하마와 코끼리 사이에서 힘이 약한 토끼는 자신의 힘으로 하마와 코끼리와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꾀를 써서 두 사람이 줄다리기를 하도록 한다. 그 사이 자신은 자신의 장점인 달리기로 재빠르게 언덕으로 도망친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이 말은 남자들에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같은 말이  아닐까싶다. 왜 남자라고 한정을 짓냐면, 유독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강하지 않은 남성성을 가진 아이가 피해의 대상이 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근데 관찰해볼수록 의외로 강한 것을 강요받아야 하기에 고통받는 남자들이 많았다. 바로 나의 아들 평화도 그렇다.


평화가 울 때 나도 같이 마음으로 운다. 아이는 알까. 언제나 내가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친구관계야말로 평화가 풀어야 하는 숙제다. 자신이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하고, 부딪혀보고 싸우며 친밀해지는 것이다. 성장통이라고 표현하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내 아이의 줄다리기가 신학기가 지나고 아이들의 내숭이 벗겨지자 점점 격렬하게 시작된 것 같다. 평화는 이 통과의례를 분명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그랬듯이 어떤 고난도 결국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결국 아문다. 평화는 1학년, 단체생활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12년 동안은 앞으로도 더 많이 울 일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운만큼 자랄 것이다. 더 많이 고민한사람이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


토끼도 약한 자신의 힘으로 하마와 코끼리를 이기기 위해 고민했다. 하마와 코끼리를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면서 둘이 싸움을 하게 둔다. 그들이 자신이 싸우던 대상이 토끼가 아니라 하마와 코끼리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미 토끼는 도망 가 있었다.

힘만 쎈 이들에게 꾀를 내어 직접 싸우기보다는 둘이 싸우게 두거나, 도망가라는 전략을 알려준 존버닝햄 아저씨도 분명 평화처럼 울었던 시절 동안 깨달은 사실일 것 같다.

평화도 이렇게 몇번의 줄다리기를 마치면 토끼처럼 더 이상 하마와 코끼리를 보며 겁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힘보다 큰 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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