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 중후반, 약해진 허리만큼 가벼워진 가방. 외출할 때는 욕심껏 넣었던 가방을 문 앞에서 빼고 나간다. 마지막까지 이 물건만큼은 가방에서 절대 빼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검은색 무광 만년필이다.
사실 이 만년필뿐만 아니라 스무자루 이상의 만년필을 가지고 있다. 그 만년필마다 주사기로 잉크를 채워 볼펜처럼 사용하게 된 지는 4-5년 정도 되었다. 코로나 기간 집안에 갇혀 있으면서 우울할 때 보상처럼 나에게 선물하기도 했고, 당근마켓에서 동네 사람들이 선물 받은 만년필을 처분하는 것들을 줍줍 하다 보니 만년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당근마켓에 주로 나오는 만년필은 라미, 파버카스텔, 파커가 많았다. 회사에서 단체로 구입해서 선물로 로고를 찍어서 뿌린 경우도 많았다. 나는 대기업 만년필들을 직원도 아닌데 애사심을 느끼며 잘 쓰고 있다. 그것들은 새것인데도 꽤나 저렴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가의 물건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당근마켓에 집안에 묵은 14k촉 만년필을 급매로 처분하기도 한다. 그분은 귀찮으니 적당한 가격에 팔지만 나는 구입하는 순간까지 표정관리를 하면서 발걸음이 훨훨 날아갔다. 마음속으로는,
진정하자! 진정!
처음에는 저렴하게, 그렇게 점점 비싼 만년필을 하나씩 질러보기도 했다. 경험해 보니 비싸든 싸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는 20만 원대의 만년필이 있지만, 지금 가장 잘 사용하는 이 만년필은 4만 원대인 것처럼. 내 손에 잘 맞는 만년필이 최고인 것이다.
결국 만년필은 손맛이다. 직접 만지고 골라야 한다. 수업료를 너무 많이 치르고 늦게 안 것 같다. 아이에게 만년필을 사줄 때는 펜카페에 가서 세상 만년필 다 시필해보게 하고 사주어야겠다. 손으로 잡는 펜바디의 촉감과 배럴을 만지면서 느껴지는 굵기와 무게, 날렵한 펜촉이 종이와 닿으며 생기는 잉크의 색을 바라보면 세상 근심이 사라진다.
김연아가 아이스링크장에서 미끄러진다면, 나는 책상에 혼자 앉아서 만년필로 종이에 끄적이며 미끄러진다. 혼자 중얼거리며. 이 펜이야. 바로 너라고. 노트에 혼자 적는다.
이 펜은 당근마켓에서 구입한 것이 아니다. 중국제 만년필 마존 브랜드로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야자컴퍼니 가게에서 구입했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하단에 링크를 첨부하겠다. 내돈내산. 순수한 고백이다. 이 만년필이 왜 좋냐? 더 비싸고 좋은 수많은 만년필을 두고 사용하는 이유를 말하자면, 내 손과의 단순한 궁합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검은 무광의 쇠 느낌 무게를 좋아한다. 단단한 총알을 쥔 것처럼, 소심한 내가 이 펜을 들면 강해진 것 같다. 게다가 뒤축을 누르면 펜촉이 들어가기 때문에 뚜껑을 닫았다 열었다 하는 만년필의 번거로움이 없다. 이 만년필의 단점이라면 이렇게 꺼낸 채로 떨어트릴 경우, 펜촉이 상할 수 있다. 물론 절대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
만년필을 지금까지 쓰면서 딱 한 번 떨어트린 적이 있었다. 워터맨 만년필이었는데 그대로 장판에 꽂혔다. 펜촉을 빼내고 보니 닙이 f촉이었던 것이, m촉이 되었다.
… 오히려… 좋아!
변태처럼. 새로운 연인을 찾듯이. 새로운 친구를 만나듯이 하나씩 들이고 닦고 잉크가 말라 펜촉이 마르면 물에 꽂아 다시 닦아준다. 하루라도 이 만년필을 만지지 않거나, 가방에 넣고 나오지 않는 날은 안절부절못하기 일쑤다. 뭔가 재밌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이 펜을 꺼내 적고 싶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만년필에게 찰떡처럼 어울리는 만년필 커버가 있다. 바로 헤비츠 가죽 펜파우치로 내가 좋아하는 카키색가죽과 환상의 궁합을 자랑한다.
나는 원래 가죽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허리가 아프고, 가죽가방 안에 책을 넣고 다니면 가방이 아니라 돌덩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가죽은 작은 소품류가 아니면 더 이상 탐을 내지 않게 되었다. 그런 아쉬움을 이 펜파우치로 해소하고 있다. 헤비츠의 가죽은 질이 좋고탄탄해서 만년필을 보호하고, 만년필을 빼도 탄탄하게 형태랄 유지하면서도 만졌을 때의 촉감은 쫀득하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 찾은 만년필 조합이라니 , 나는 바로 이 만년필이 애착펜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펜과 함께 매일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 하루하루가 꽤나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나는 이상하게도 물건에게 마음을 주고, 애착을 느끼고, 내 삶의 방향과 의미까지 더한다. 그것이 때로는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편하고 쉬운 해소법이지만 헛헛해질 때도 있다. 반면 물건을 좋아하는 만큼 나는 저장강박이 있기에 그 물건에게 압도되지 않도록 늘 조심한다. 이제는 더이상 물건에만 기대며 지내기보다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만년필처럼 편안한 친구가 되고 싶다.
링크>
마존 구 문맨 A1 만년필 (https://m.smartstore.naver.com/yaja/products/6808286494?NaPm=ct%3Dlohag9gw%7Cci%3D73854489a1e8c940b324ef501d113701040f465f%7Ctr%3Dsls%7Csn%3D822481%7Chk%3D8b137e63a5d76e08ffabed23e46c1f32f7cea3b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