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 첫사랑의 끝은...
신혼일 때 나는 초등학교 좋아했던 아이가 자꾸 꿈에 나왔다. 모습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중학교 졸업식 때의 그 아이였다. 그는 내게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은... 나는 너를 좋아했었어.’
바보 같이 나는 그 꿈이 벅차고 행복해서 눈을 뜨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보았다. 그렇지만 알고 있다. 나는 삼십대, 결혼을 한 아줌마이고 이불에 누워서 잠을 자다가 개꿈을 꾼 것이라는 것을. 이 꿈은 세 네 번을 꾸고 나서, 이 아이가 도대체 나에게 뭐길래 이토록 꿈에 나와서 계속 나를 사랑해주길 원하는 걸까.
그 아이를 주인공으로 여러 가지의 상황들을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이 아이가 내 옆집으로 이사 와서 놀이터에서 정신과 의사로 만나, 나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우리 아이와 그 사람의 아이가 함께 놀고 이러면 어떨까. 나는 그 사람이랑 다시 만나보고 싶은 걸까.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나의 무의식에 남은 이 아이와 꿈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다.
헌데 기묘한 일이 생겼다. 나에게는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첫사랑인 그 아이의 동생과 둘이 동갑이며 같이 학교를 다니면서 절친이 되어 있었다. 간간히 그 아이의 소식들을 전해 듣기는 했었다. 병에 걸려서 아팠지만 지금은 대기업에 들어가서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의외로 늦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동생은, 첫사랑이 아닌 그 동생 친구가 먼저 결혼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의 형도 결혼식에 참석을 하지 않겠냐고. 나더러 그렇게 좋아하고 궁금하면 결혼식에 같이 참석하자고 했다.
‘아니, 절대...로 그럴 용기가 없어.’
나는 동생의 친구와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다. 결혼식에 참석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 제안을 흘려 보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동생의 친구 결혼식이 되었을 때 남동생은 짓궂은 초대장을 내게 보냈다. 우리 부부와 동생 부부랑 그 친구의 결혼식장 앞 서울 숲 공원에서 놀자는 것이었다.
전화를 받았던 그 날에 남편은 밤새 일을 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남동생이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 결혼식장에 가는 것은 아니고, 그저 남동생부부랑 놀려고 간 것이었다. 다음날 두 아이들을 데리고 택시를 탔다. 서울숲은 세련된 청년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전혀 그런 청년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계속 첫사랑을 찾고 있었다. 사실 내심 우연히 그곳에서 첫사랑이었던 그 친구를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보고 싶어서... 긴장이 되었다.
공원에 도착하고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설레었다. 이런 감정이 오랜만이기도 했다. 물론 따로 남동생이 그쪽에 연락을 하거나 약속을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우리가 만날지도 몰라. 우연히 마주친다면...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런 상상에 만감이 교차했다.
끝끝내 나는 결혼식장에는 가지 않겠다 했고. 남동생만 잠시 친구에게 얼굴을 비추고 돌아왔다. 대신 남동생이 그 첫사랑의 사진을 찍어주기로 했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얼마나 늙었을까. 여전히 잘 생겼겠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뿔싸. 남동생이 핸드폰을 결혼식장에 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편은 밤새 야근을 하고 돌아와서 퀭한 얼굴이었다. 놀이터에는 코로나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버글버글했다. 우리는 서울숲을 돌아다닐 수 있는 대형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첫째 아이의 요구에 따라 서울숲을 한 바퀴를 돌면서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찾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빌릴 곳을 찾다보니 점점 점심에 먹은 신호가 오고 있었다. 남동생이 말하던 결혼식장이 여기 같은데, 나는 혹시나 그 아이를 만날까봐 얼른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일을 처리하고 나온 후, 남동생은 그 결혼식장이 맞다며 살짝 보고오지 라며 끝까지 짓궂게 놀렸다. 보면 뭐하겠는가. 이 뚱뚱한 아줌마를.
첫사랑의 추억은 이제 아련하지도 않고, 점점 옅어져 간다. 결혼식장에서 첫사랑보다 화장실을 찾은 것처럼 지나간 감정은 그대로의 시간 속에서만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그 아이는 이런 나의 감정을 알 필요가 없다.
남동생의 도움으로 이제는 그 아이에게서 벗어난 것 같다. 환상처럼 아른거린 그 아이의 사랑 고백보다는, 내 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밤새 일하고도, 퀭한 눈으로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던 남편이 사실 더 애처롭다. 꿈마저 사라진 밤이 되었다. 때때로 지친 남편이 회사에서 상처받고 술 마시고 잠들어 있으면 꼭 안아주고 싶다. 이상한 첫사랑의 정체를 쫓아 잠시 아련해보았던 것을 이렇게 그에게 마음 속으로 사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