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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토리 Apr 26. 2022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

코드 브레이커/ 월터 아이작슨


연구원들은 놀라운 연구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바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열정을 쏟는지, 또 그 사회는 얼마나 경쟁적이면서 동시에 협력적인지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진로도 연구원을 선택했다면, 이들처럼 모든 것을 바쳐 일할 수 있었을까를 떠올리며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들과 함께 울고 웃는 감동적인 간접 경험을 했다.

어려워 보였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술술 읽혀나가 많은 양에도 불구하고 금방 읽었다.


과학의 발전이란 비약적인 단일 발견이 아닌, 작은 단계들이 모여 차근차근 이루어진다.

다우드나 박사님


이 책은 주인공인 다우드나를 중심으로, 만나고 교류하는 많은 바이오 연구자들과 그들이 하는 크리스퍼 연구에 대해서 서술한다.


크리스퍼 기술의 놀라운 이점과, 또 그에 따른 윤리적인 문제와 사회적 합의에 대해 설명한다.


그들이 개발한 유전자 편집 도구인 크리스퍼는, 10억년 이상 바이러스와 싸워온 박테리아(세균)의 바이러스 퇴치 기술에 바탕을 두고있다.


박테리아는 자신의 dna에 새겨 넣은 크리스퍼라는 반복된 염기 서열을 이용하여, 과거 자신을 공격한 바이러스를 기억해 두었다가 재침입하면 즉시 파괴할 수 있다. 새로운 바이러스와 싸우도록 스스로를 개조하는 면역 체계로, 반복적인 바이러스의 대 유행으로 고통받는 현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 기술

크리스퍼는 박테리아와 고세균에서 기원했으므로, 크리스퍼는 핵이 없는 단세포 생물의 시스템에서 작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스템이 핵이 있는 생물, 구체적으로 식물, 동물, 그리고 우리 인간과 같은 다세포생물에서 작동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2012년 6월 출판된 다우드나-샤르팡티에의 크리스퍼 논문을 시작으로, 많은 연구 팀들이 크리스퍼-cas9이인간 세포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노력으로 6개월 만에 다섯 곳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처럼 빠른 성공은 크리스퍼-cas9이 인간 세포에서 기능하도록 개량하는 과정이 아주 쉽고 뻔해서, 독립적인 발명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의 증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동시에 치열한 경쟁 끝에 탄생한 중요한 발명이었음을 증명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제 크리스퍼는 겸상적혈구 빈혈증, 암, 시각 장애의 치료에 사용된다. 그리고 2020년에 다우드나 연구 팀은 크리스퍼를 이용해 코로나바이러스를 감지하고 파괴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다우드나는 이렇게 말한다.


"크리스퍼는 박테리아가 바이러스와의 장기전을 겪으며 진화시킨 방어 기술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제 세포가 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을 키워낼 때까지 기다릴 수 없고, 따라서 고유한 독창성을 발휘해 자연면역을 대신할 방법을 찾아야 하죠. 그 도구의 하나가 고대 박테리아의 면역계라는 사실이 더없이 절묘하지 않나요? 이런 게 자연의 아름다움일 거예요."


그렇다, 자연은 아름답다.


유전자 편집 기술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졌다. 그러나 그 기술로 인간을 개조하고 이를 미래 세대에 대물림한다는 생각은 다우드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미래의 프랑켄슈타인에게 도구 상자를 쥐여준 건 아닐까?” 더 끔찍한 것은 미래의 히틀러가 이 도구를 휘두르게 될 가능성이었다.


세상에는 구분짓는 일에 능숙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구분해 놓은 것을 뒤집는 일에 선수인 학자들도 있다. 말하자면, 선을 명확하게 긋는 윤리학자와 그 선을 뭉개는 윤리학자가 있다는 얘기다. 선을 뭉개는 사람들은 종종 이 경계가 너무 흐릿해 굳이 따지고 구분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 다양성의 손실

영화 가타카

영화 〈가타카〉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착상 전 진단 기술을 사용한 맞춤 아기 서비스가 이미 뉴저지주의 신생 기업 ‘게노믹 프리딕션(Genomic Prediction)’에서 현실화되었다. 난임 클리닉이 후보 아기들의 유전자 샘플을 보내면 이 회사에서는 며칠 된 배아 세포의 DNA를 시퀀싱하여 주어진 긴 목록에 오른 각각의 항목이 발현할 통계적 확률을 계산한다. 예비 부모는 원하는 아이의 특성을 따져 어떤 배아를 착상할지 결정한다. 낭포성 섬유증이나 겸상적혈구와 같은 단일유전자 이상을 검사할 수 있고, 당뇨병과 심장 질환, 고혈압 등 다수의 유전자가 관여하는 질병도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회사 홍보 자료에 따르면 ‘지적장애’ 또는 ‘신장’도 선별 가능하다. 회사 설립자들은 앞으로 10년이면 지능지수까지 예측해 부모가 머리 좋은 아이를 선택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일을 단순히 개인의 결정에 맡겼을 때 생길 문제에 대해 알 수 있다.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또는 자유지상주의 유전학은 결과적으로 정부가 통제하는 우생학 못지않게 다양성을 제거할 뿐 아니라 소위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편차가 사라진 사회를 낳을 수 있다. 부모에게는 마음 놓이는 일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사회의 창의성과 영감, 예리한 주변부는 훨씬 부족해질 것이다. 다양성은 사회만이 아니라 우리 종에도 유용한 덕목이다. 여타 종들처럼 인간의 진화와 탄력성도 유전자 풀 안에 존재하는 무작위성에 의해 강화되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가치가 개인이 선택하는 가치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우리는 키가 크고 작은 사람,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모범생과 문제아, 앞을 볼 수 없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모두 존재할 때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이롭다고 느낀다. 그러나 단지 사회의 다양성을 키우자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바람직한 유전자를 포기하라고 요구할 도덕적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국가가 그걸 요구하길 바라겠는가?


반 고흐

심리 장애를 앓고 있는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수천명에 이른다고 한다. 감정의 기복, 환상, 망상, 충동, 광기, 중증 우울증은 인간의 창조성과 예술성을 어느 수준까지 자극할까? 강박증과 조울증 없이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 힘들까? 만약 자녀가 자라서 빈센트 반 고흐가 되어 예술가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리라는 예언을 듣는다면, 당신은 아이의 조현병을 그냥 내버려두겠는가, 아니면 치유하겠는가?(반 고흐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개인의 욕구와 인류 문명에 바람직한 형질 사이의 잠재적 갈등을 직면한다. 환자 본인과 가족은 기분 장애의 감소 및 제거를 큰 혜택으로 받아들이며, 또 바랄 것이다. 한편 사회적 관점에서 묻는다면 사정이 달라질까? 약물로, 그리고 결국엔 유전자 편집으로 기분 장애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 우리 사회는 행복을 얻는 대신 헤밍웨이를 잃게 될까? 반 고흐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도 좋을까?


● 불평등, 부의 대물림이 아닌 부자의 유전자 대물림?

개인의 선택을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는, 유전자 편집이 불평등을 강화하고 심지어 부호화하여 영구적으로 우리 종에 새겨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미 출생 환경과 부모의 선택에 따른 불평등을 용인하고 있다. 사람들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좋은 학군에서 공부하게 하며 축구를 가르치는 부모를 존경한다.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면서도 애들한테 과외 선생을 붙이고 컴퓨터 캠프에 보내는 부모들을 인정한다. 이 대부분을 타고난 특권의 이점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미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불평등을 더욱 강화하거나 영원히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최고의 유전자를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일은 불평등의 진정한 양자적 도약을 초래할 것이다. 단순히 껑충 뛰어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궤도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수백 년에 걸쳐 출신에 기반한 귀족주의와 카스트제도를 애써 축소한 끝에 대부분의 사회가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라 할 만한 한 가지 도덕원리를 받아들였다. ‘기회균등’이라는 명제를 믿게 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조에서 비롯한 사회적 유대감은 경제적 불평등이 유전적 불평등으로 전환되는 순간 산산조각 날 것이다.


유전자 편집이 본질적으로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부자가 최고의 유전자를 구매해 가문에 영구히 새기는 자유시장 상점의 일부로서 이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신처럼 구는 행위를 반대하는 보다 근본적인 논지에 대해서는 하버드대 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가장 명료하게 설명했다. 인간이 자연의 복권을 조작하고 자식의 타고난 유전적 자질을 개조하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자질을 선물로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불운한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신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나에게 닥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공감을 파괴한다. “정복을 향해 무작정 달리다 보면 인간의 능력과 성취라는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을 미처 갖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러한 감정을 파괴할 수도 있다. (…) 삶을 주어진 선물로 인정하는 것은 곧 재능과 능력이 전적으로 자기 행동의 결과는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우리가 자연이 제공한 모든 선물을 숭배해야 한다고 믿지 않으며, 그건 샌델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역사는 팬데믹이든 가뭄이든 폭풍이든 우리가 굳이 원하지 않았던,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을 극복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탐구의 과정이었다. 세상에 알츠하이머병이나 헌팅턴병을 선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암과 싸우기 위해 항암 요법을 개발하고, 코로나바이러스와 대적하기 위해 백신을 만들고, 선천적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유전자 편집 도구를 개발할 때, 우리는 이 원하지 않았던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아주 적절히 발휘하는 셈이다.


그러나 샌델의 주장은 특히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향상과 완벽을 설계하고자 할 때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원하지 않은 선물을 완벽하게 정복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대한, 심오하고 아름다우며 심지어 영적인 견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복권의 변덕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되, 우리에게 부여된 것을 통제하려는 프로메테우스식 도전 또한 피해 가야 한다. 지혜란 적절한 균형을 찾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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