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모자를 쓸 결심

by 새해

추석연휴, 20개월 조카 손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손뼉 치고 노래를 부르다가, 바다 위로 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보다가 생각한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이제 추석에도 나이를 먹는다.


스무 살의 나는 60세를 먼 미래라고 생각했다. 이십 대 중반 처음 가입한 암보험은 보장 연령이 60세였다. 그때는 당연한 계약기간이었다. 3년 전에 보험기간이 끝났고, 만기까지 생존했으므로 건강확인축하금을 받았다. 내가 준비했던 먼 미래에 도착한 것이다. 와서 보니 이제 100세 시대, 아니 120세 시대를 말한다. 60은 마무리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란다. 고요히 물러설 생각 말고 조금 더 살아야 한단다. 젠장, 늙기도 어렵다.


늙음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시가 있다. 영국 시인 제니 조셉(Jenny Joseph 1932~2018)의 경고(Warning)라는 시다. When I am old women......으로 시작하는 시의 화자는 말한다. 내가 늙은 여인이 되면 어울리지도 않고 맞지도 않는 보라색 옷에 빨간 모자를 쓰고 브랜디를 사고 새틴 샌들을 사고 버터 살 돈도 없이 연금을 써 버리겠다고, 피곤할 땐 그냥 길바닥에 주저앉고 남의 정원에서 꽃을 꺾고 침 뱉는 법도 배우겠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화자는 아직 단정한 옷을 입고 집세를 내야 하고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미리 연습을 하겠다고 한다. 갑자기 늙어 보라색 옷을 입기 시작해도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나이가 들면 가족이나 이웃 눈치 안 보고 체면이나 규범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겠다고, 일탈도 서슴지 않겠다고, 유머와 위트를 담은 시다. 시 제목이 희망 사항이 아니고 "경고"인 까닭은 바람을 넘어 강력한 의지로 느껴진다.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빨강모자협회 (Red Hat Society)도 있다. 엘렌 쿠퍼라는 미국 여성이 친구들에게 생일 선물로 제니 조셉의 시와 빨간 모자를 선물하면서 시작된 중년 여성들의 사교 모임이다. 50세 이상의 여성들이 빨간 모자와 보라색 옷을 입고 티파티에 참석하고 게임 혹은 영화를 즐긴다. 이 단체가 추구하는 것은 배움도 나눔도 아닌 즐거움이다. 젊음에서 물러난 여성들의 우정, 재미, 휴식의 가치를 강조한다. 유일한 규칙은 빨간 모자를 쓰고 보라색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빨간 모자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나이 듦을 숨기지 않고 위축되지 않고 노년의 삶을 당당하게 드러내겠다는 선언이다.


빨강모자협회가 흥미로웠던 건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는 사교 모임은 사실 나와는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이다. 관계에 관한 한 편협하고 편애가 심한 편이다. 웃고 떠들고 밥을 먹는 관계는 성향이 비슷한 사람 둘셋이면 충분하고 다섯 명 이상이면 그 자리에 갈까 말까 고민을 시작한다. 불가피하게 참여해야 하는 경우 미리부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일단 참석하면 사람들과 매우 잘 어울리지만 그러기 위해 모임 내내 과도한 에너지를 쓰고 집에 돌아오면 탈진해 버린다. 즐겁기 위한 사교 모임이 나에겐 노동이다. 동창회 동문회는 물론 무슨 협회, OO회, OO회 등 직업적으로 필요한 협회도 조기 탈퇴하거나 아예 가입조차 하지 않았다. 세월을 따라 많은 것이 변했지만 20개월 조카 손녀의 낯가림처럼 나의 낯가림은 평생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 내가 빨강모자협회 비슷한 걸 하나 만들어 볼까? 아님 가입을 할까? 궁리 중이다. 남들이 알면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래 살고 볼일이네!" 60년 동안 혼자 시간 보내는 걸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으로 살았으니 인생 후반부는 무리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 비록 얼마지 않아 다시 이쪽으로 건너올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생각은 한번 해 보고 싶다.


육십 대에는 일본어 공부, 칠십 대에는 바이올린 연습에 매진하는 것으로 은퇴 후 계획을 세워 놓았지만 거기에 덧붙여 지금부터 연습하고 싶은 게 빨간 모자를 쓰고 사교 모임에 나갈 용기다. 무채색과 블루진으로 가득한 옷장에 보라색 원피스와 빨간 모자를 섞어 넣고, 나와 다른 사고방식의 사람들과 만나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맥락 없고 무체계한 일도 막 벌여 보고 싶다.


"벌이겠다!"라는 경고가 아니고 희망사항이다. 어차피 나이를 먹어도 나는 나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살아온 습관대로 취향대로 먹고 입고 만나고 늙을 것이다. 그러니 빨간 모자를 쓸 결심이란 얼마나 큰 결심인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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