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놓치기로 했다

by 새해

머리를 말리며 이걸 입을까 저걸 입을까?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미국에 전화를 걸어 달라고 했다. 서울에서 전시를 보기로 한 날이다. 예약된 기차 시간은 10시 30분,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잠시 망설였다. 사실, 서울 다녀와서 이따 밤에 통화하자고 해도 이해 못 할 어머니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기차 시간을 상기시키는 대신 "네!" 흔쾌히 대답했다


전 날 미국에 사는 이모님의 부고를 들었다. 101세, 천수를 누리셨다. 이모의 큰 아들인 명식 오빠의 전화에 어머니는 그래! 그래! 그래만 되풀이했다. 전화 후에도 별말씀이 없었다. "오래 잘 살았지 뭐!" "이제 나만 남았네! "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밤새 어떤 많은 생각이 오고 간 것일까?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나에게 지금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그 마음을 짐작할 순 없어도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하면 안 되겠다는 건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대로 집을 나서면 어머니도 나도 온종일 마음 불편할 것이 자명했다.


하루하루 쇠락하는 어머니와 함께 산 지 9년이 되었다. 백세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살면서 늘 반복하는 것이 있다. 매일 아침, 이 아침이 마지막 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순간이 마지막 말, 마지막 짜증, 마지막 부탁으로 남을 수 있음을 기억하려 한다.


어머니의 요청대로 미국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전 날 통화와 달리 오빠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이모의 마지막은 어땠는지, 편히 가셨는지, 다른 가족들은 모두 잘 있는지. 누구를 바꾸고 누구를 바꾸고 이모네 가족들이 돌아가며 안부를 전했다. 사이사이 나도 끼어들었다. 통화는 끝날 듯 끝날 듯 계속 이어졌다. 초조하지 않았고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기차를 놓치기로 했으므로.


나이를 먹어 좋은 건 안달이 줄었다는 것이다. 기차를, 버스를, 기회를 한두 번 놓친다고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 순간 내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건 기차가 아니라 어머니의 애도였다. "너네 둘째 이모 정말 예뻤어, 똑똑하고! " 어머니는 이모와 오래도록 멀리 떨어져 살아 그런지 복잡한 마음 없이 좋은 추억만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족이란 가까이 살수록 사랑과 더불어 원망, 죄책감, 슬픔도 쌓이는 법이니까. 어머니와 이모 얘기를 하면서 잠시 내 형제들의 죽음을 상상했다. 100살 아니 200살이어도 호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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